해변의 카프카
해변의 카프카
P17. 어떤 경우에는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진로를 바꿔가는 국 지적인 모래폭풍과 비슷하지. 너는 그 폭풍을 피하려고 도망치는 방향 을 바꾼다. 그러면 폭풍도 네 도주로에 맞추듯 방향을 바꾸지. 너는 다 시 또 모래폭풍을 피하려고 네 도주로의 방향을 바꾸어버린다. 그러면 폭풍도 다시 네가 도망치는 방향으로 또 방향을 바꾸어버리지. 몇 번 이고 몇 번이고, 마치 날이 새기 전에 죽음의 신과 얼싸안고 불길한 춤 을 추듯 그런 일이 되풀이되는 거야. 왜냐하면 그 폭풍은 어딘가 먼 곳 에서 찾아온, 너와 아무 관계가 없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그 폭 풍은 그러니까 너 자신인 거야. 네 안에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러니까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모든 걸 체념하고 그 폭풍 속으 로 곧장 걸어 들어가서 모래가 들어가지 않게 눈과 귀를 꽉 틀어막고 한 걸음 한 걸음 빠져나가는 일뿐이야. 그곳에는 어쩌면 태양도 없고 달도 없고 방향도 없고 어떤 경우에는 제대로 된 시간조차 없어. 거기 에는 백골을 분쇄해 놓은 것 같은 하얗고 고운 모래가 하늘 높이 날아 다니고 있을 뿐이지. 그런 모래폭풍을 상상하란 말이야.
P84. 나는 자유다, 라고 생각한다. 눈을 감고, 내가 자유다, 라는 것에 대해 한동안 생각한다. 그러나 자유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아 직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외톨이라는 사실뿐이다. 혼자 모르는 고장에 와 있다. 자석도 지도도 잃어버린 고독한 탐험가처럼. 자유란 이런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조 차도 잘 모르겠다.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둔다.
오랫동안 욕조에 몸을 담그고 세면대에서 정성 들여 이를 닦는다.
침대에 드러누워서 다시 책을 조금 읽는다. 책을 읽는 데 지치면 텔 레비전 뉴스를 본다. 그렇지만 오늘 하루 사이에 나한테 일어난 일 에 비하면, 모두 김빠진 따분한 뉴스뿐이다. 바로 텔레비전을 끄고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간다. 시계는 벌써 열 시가 지나 있다. 하지 만 쉽게 잠을 잘 수가 없다. 새로운 장소에서의 새로운 하루. 그날 은 나의 열다섯 번째 생일이기도 하다. 나는 생일의 대부분을 이상 한, 그리고 꽤 매력적인 도서관에서 보냈다. 새로운 사람들을 몇 명 만났다. 사쿠라 그리고 오시마 씨와 사에키 씨. 다행히도 나를 겁먹 게 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이것은 좋은 징조일지도 모른다.
P153. 나가타 씨는 몸에서 힘을 빼고, 머리의 스위치를 끄고, 존재를 일종의 '통전 상태' 로 만들었다. 그에게 통전 상태란 극히 자연스 러운 행위이며, 어렸을 때부터 특별히 생각하지도 않고 일상적으로 해온 일이었다. 얼마 뒤 그는 의식 주변의 가장자리를, 나비처럼 흔 들흔들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가장자리 너머에는 어두운 심연이 펼 쳐져 있었다. 이따금 가장자리를 벗어나 그 아찔한 심연 위를 날았 다. 그러나 나카타 씨는 거기에 있는 어둠이나 깊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그 바닥이 보이지 않 는 무명의 세계는, 그 무거운 침묵과 혼돈은, 오래된 그리운 친 구이자 지금은 자신의 일부이기도 했다. 나가타 씨는 그것을 잘 알 고 있었다. 그 세계에는 글씨도 없고, 요일도 없고, 무서운 지사님 도 없고, 오페라도 없고, BMW도 없다. 가위도 없고, 길쭉한 모양 의 모자도 없다. 그렇지만 동시에 장어도 없고, 팥빵도 없다. 거기 에는 전부가 있다. 그러나 거기에 부분은 없다. 부분이 없으니까 이 것하고 저것을 바꿀 필요도 없다. 떼어내거나 덧붙이거나 할 필요 도 없다. 어려운 일은 생각하지 않고, 전부의 속으로 몸을 담그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나가타 씨에게는 무엇보다도 고마운 일 이었다.
P235. 나는 오시마 씨가 이 의자에 앉아서 뾰족한 연필을 손에 들고 책 표지 안쪽에 메모를 쓰고 있는 광경을 상상한다. 꿈속에서 책임은 시작된다. 그 말이 나의 가슴을 울린다.
나는 책을 덮고 무릎 위에 놓는다. 그리고 내 책임에 대해 생각한 다.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내 흰 티셔츠에는 피가 묻어 있었던 것 이다. 나는 이 손으로 그 피를 씻어냈다. 세면대가 새빨갛게 될 정 도의 피였다. 그 피에 대해 나는 아마도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내 가 재판에 회부되어 있는 장면을 상상한다.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 고, 책임을 추궁하고 있다. 모두 내 얼굴을 노려보고 손가락질을 해 댄다. 기억에 없는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질 수 없다, 고 나는 주장 한다. 거기에서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것조차 나는 모른 다. 그러나 그들은 말한다. "누가 그 꿈의 본래 소유자이든, 너는 그 꿈을 공유했다. 그러니까 꿈속에서 행해진 일에 대해 너는 책임을 져야 한다. 결국 그 꿈은 네 영혼의 어두운 통로를 통해서 숨어 들 어온 것이니까."
히틀러의 거대하게 일그러진 꿈속에, 어쩔 수 없이 말려 들어간 아돌프 아이히만 중령과 마찬가지로.
P323. 게이든, 레즈비언이든, 정상인이든, 페미니스트든, 파시스트의 돼지든, 공산주의자든, 힌두교 신자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 어. 어떤 깃발을 내걸든 나는 전혀 상관하지 않아. 내가 견딜 수 없 는 것은 그런 공허한 사람들이야. 그런 사람들과 부딪치면, 나는 참 을 수가 없거든. 나도 모르게 하지 않아도 될 쓸데없는 말을 입에 담게 돼. 조금 전의 경우도 적당히 받아넘기고 적당히 맞장구를 쳤 으면 됐을 텐데. 아니면, 사에키 씨를 불러서 맡겼으면 됐을 텐데.
그녀라면 미소 띤 얼굴로 능숙하게 대처했을 거야. 그런데 나는 늘 그렇게 할 수가 없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마구 하는가 하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해버리거든. 나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어. 그게 내 약점이야. 어째서 그게 약점이 되는지 알겠지?"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을 일일이 진지하게 상대하다가는 몸이 열 개 있어도 모자란다, 는 얘기인가요? 하고 나는 말한다.
"그래, 맞아" 하고 오시마 씨가 말한다. 그리고 연필의 지우개 부 분으로 가볍게 관자놀이를 누른다. "정말 그래. 하지만 다무라 카 프카 군, 이것만은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야. 결국 사에키 씨의 연 인을 죽인 것도 그런 인간들임에 틀림없어. 상상력이 결여된 속 좁 은 비관용성## 독불장군 같은 계급투쟁의 운동 방침, 공허한 말들, 찬탈된 이상 산, 경직된 시스템. 내가 정말로 두려운 것은 그 런 것들이야. 나는 그런 것을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증오해. 무엇이 옳고, 옳지 않은가 -물론 그것도 매우 중요한 문제지. 그러나 그런 개별적인 판단은 혹시 잘못되었더라도 나중에 정정할 수 있어. 잘 못을 스스로 인정할 용기만 있다면, 대개의 경우는 돌이킬 수 있지.
그러나 상상력이 결여된 속 좁은 것이나 관용할 줄 모르는 것은 기 생충과 마찬가지거든. 중간 숙주호를 바꾸고 형태를 바꾸어서 끝 없이 이어져 가는 거야. 거기에는 구원이 없어. 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을 여기에 들여놓고 싶지는 않아." 오시마 씨는 연필 끝으로 서가를 가리킨다. 물론 그는 도서관 전 체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것을 적당하게 웃어넘길 수 없어."
하권 p161. "사에키 씨에 대해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해도 괜찮겠습니 까?"
"물론 괜찮지."
"사에키 씨가 하려는 것은 아마도 잃어버린 시간을 메우는 일일 겁니다."
그녀는 그 말에 대해서 잠시 생각하고 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고 그녀는 말한다. "하지만 다무라 군이 어떻게 그것을 알지?"
"어쩌면 저도 같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잃어버린 시간을 메우는 일?"
"그렇습니다" 하고 나는 말한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꽤 많은 것 을 빼앗겨왔습니다. 수많은 소중한 것들을 말입니다. 저는 지금 조금 이나마 그것을 되찾아야 합니다."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저에겐 필요합니다.
사람에게는 되돌아갈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합니다.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에게나 사에키 씨에게나요." 그녀는 눈을 감고 책상 위에서 두 손을 깍지 낀다. 그리고 체념한 듯이 다시 눈을 뜬다. "너는 누구지? 하고 사에키 씨가 묻는다.
"어떻게 여러 가지 일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지?"
내가 누군지 사에키 씨는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하고 너는 말 한다. 나는 <해변의 카프카>입니다. 당신의 연인이며, 당신의 아들입 니다. 까마귀 소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둘 다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 다. 우리는 커다란 소용돌이 속에 있습니다. 때로는 시간의 바깥쪽에 있습니다. 우리는 어딘가에서 벼락을 맞은 겁니다. 소리도 없고 모습 도 보이지 않는 벼락에.
P170. 호시노 청년은 푹신한 의자에서 눈을 감고 음악을 들으며 여러 가지를 생 각했다. 주로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하 면 할수록 거기에는 실체가 없는 것 같았다. 있는 것은 단지 의미 없 는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까지 드래곤스를 열심히 응원해 왔다. 그러 나 나한테 드래곤스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드래곤스 가 자이언츠에 승리하면, 나라는 인간이 조금이라도 향상된단 말인 가? 향상될 리 없지, 하고 청년은 생각했다. 그럼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마치 자기의 분신처럼 지금까지 열심히 응원해 온 걸까?
나가타 씨는 자신이 텅 비었다고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나카타 씨는 어렸을 때 당한 사고 때문에 텅 비 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사고도 당하지 않았다. 만일 나카타 씨가 텅 빈 거라면, 나 따위는 아무리 생각해도 텅 빈 것 이하가 아 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카타 씨에게는 적어도, 일부러 시코 쿠까지 따라와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무엇인가가 있다. 무언가 특 별한 것이 말이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사실은 잘 모르지만.
P300. "게 어머니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니야" 하고 까마귀 소 년이 등 뒤에서 말을 건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오히려 너를 무척 깊이 사랑하고 있었어. 너는 먼저 그것을 믿어야만 해. 그것이 출발점이야."
"하지만 어머니는 나를 버렸어. 나를 잘못된 장소에 혼자 남겨두 고 사라져버렸단 말이야. 나는 그 일로 깊이 상처받고 훼손당했어.
이제는 나도 그것을 알아. 만일 나를 정말로 사랑했다면 어떻게 그 런 짓을 할 수 있겠어?"
"결과적으로는 네 말처럼 되었지" 하고 까마귀 소년이 말한다.
"너는 아주 깊이 상처를 입었고 훼손당했어. 그리고 너는 앞으로도 계속 그 상처를 짊어지고 살아가겠지. 그건 딱한 일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런데도 너는 아마 이렇게 생각해야 할 거야. 너는 아직은 그것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이야. 너는 젊고 터프하거든. 유연성도 풍부해. 상처를 치료하고, 머리를 똑바로 들고 앞으로 전진할 수 있 어. 하지만 그녀는 이제 그렇게 할 수 없어. 그녀는 그냥 잃어버린 상태인 채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어.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야. 현실적인 이점을 갖고 있는 것은 네 쪽이야.
너는 그 점을 생각해야 해." 나는 잠자코 있다.
"잘 들어. 그건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이야" 하고 까마귀 소년이 계 속한다.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야. 그녀는 그때 너를 비 려서는 안 되었고 너는 그녀한테 버려져서는 안 되었어. 하지만 일 어나 버린 일은 산산이 부서져버린 접시와 같아서 아무리 노력해도 본래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아,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리 노력해도 본래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정말 그 말이 맞다.
까마귀 소년은 말을 계속한다. "네 어머니 속에도 역시 격렬한 공포와 분노가 있었던 거야. 지금의 너와 마찬가지로. 그렇기 때문 에 그녀는 그때 너를 버리지 않을 수 없었던 거지."
"가령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해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그렇지" 하고 까마귀 소년은 말한다. 설사 너를 사랑했다 해 도, 너를 버리지 않을 수 없었던 거지. 네가 해야 할 일은, 그런 그 녀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거야. 그녀가 그때 느꼈던 압도 적인 공포와 분노를 이해하고, 너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는 거야.
그것을 계승하고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바꿔 말하면, 너는 그녀를 용서해야만 해. 그것은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해. 그것이 너한테는 유일한 구원이 되는 거야. 그리고 그 외에 구 원은 없어."
나는 거기에 대해 생각한다.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혼란스러워진 다. 내 마음은 갈기갈기 찢기고, 몸의 여기저기에서 피부가 벗겨져 나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