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게네스에 의하면 영혼의 상승이 시작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베풀어주시고 세례를 받게 되는 은총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해진다. 신비생활이란 세례를 통하여 다시 태어난 영혼과 그리스도와의 결합이 이루어지고 실현되는 과정으로서
그리스도와 영혼 사이의 친교이며 대화이다. 오리게네스는 플라톤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나, 그에게 있어서 철학이란 그리스도교
신학자에게 변증법적 사고력을 키워주는 훈련으로 유익한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온갖 인간적 지혜를
짜낼 줄 알았던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의 관심은 성서의 해석에 있었다. 성서야말로 모드 지혜와 진리의 보고였던
바, 성서해석은 오리게네스 신비신학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특히 [아가 雅歌]는 신비생활의 절정이요 영혼과 하느님의 결합을 노래한 더없이
귀중한 책이었다. 그에 의하면 구약성서에는 일곱 노래가 있는데, [아가]는 일곱째이자 가장 숭고한 노래라고 한다.
[아가]에 이르는 과정의 세 가지
요점 첫째, 하느님께로 향한 영혼의 상승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감"으로써, 다시 말하면
대종하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시작되는 것이다. 둘째로 영혼이 나아가야 할 길은 사막과 싸움터로 이어지는 가운데 영혼은 우물에서 생명의
물을 마시며 힘을 되찾는다. 이 모든 시련을 겪으며 영혼은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하느님의 은총으로 승리를 거두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메마름, 정신적 투쟁, 위안,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얻게 되는 인간적인 노력과 동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승리와도
같이 영성생활에 이르는 친밀한 동반자들이다. 셋째로는 노래(아가) 그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 크리스천 생활의 어떠한 단계에서나
영혼은 항상 노래를 부른다. 영혼은 기쁨으로 가득차 있다. 이는 오리게네스 영성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에게서는 다른
신비사상가들에게처럼 구름이나 어두운 밤 같은 밝지 못한 면을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신비주의는 빛의 신비사상이며 은총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는 점에서 비관주의와 균형을 이루고는 있지만 다분히 낙관적이다. 그러므로 [아가]는 영성생활의 절정을 노래한 기쁨의 노래이다.
인간적인 온갖 혼란의 세월이 끝나고 악행의 비바람이 싹 사라져 영혼이 다시는 흔들리지
않고 어떠한 독단론에도 휘말리지 않는 그 때가 오기까지 영혼은 하느님의 "말씀"와 일체가 될 수도, 하느님과 결합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없어지고 욕망의 폭풍이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영혼은 덕의 꽃망울을 터뜨리게 될 것이다..... 그
때에 영혼은 "비둘기의 노래"도 들을 터인즉, 이는 다름아니라 "말씀"을 베푸시는 분께서 완덕을 지닌 자들에게 들려주는 소리, 신비
속에 감춰져 있는 하느님의 오묘한 지혜의 목소리인 것이다. (아가 주해)
오리게네스는 철학자들이 철학을 세 가지 분야,
즉 윤리학ethics, 자연학physics, 형이상학enoptics, metaphysics으로 나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이 세
가지 분류를 [잠언], [전도서], [아가]에 적용한다. 윤라학은 [잠언]에, 자연학은 [전도서]에, 형이상학은 [아가]에 각각 그
뜻이 담겨 있다. 첫째는 덕을 배우는 단계이고 다음은 만물을 바르게 받아들이는 단계이며 마지막으로 하느님을 관상하며 상승하는
단계이다. 오리게네스는 처음 두 단계의 길, 즉 윤리학과 자연에 대한 관상에 있어서는 플라톤 철학을 따르고 있다. 이 두 길의
목표는 육신을 영혼에 순응하게 한 연후에 육신으로부터 영혼을 해방하는 것이다. 영혼은 육신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에 비로소 형이상학의 길,
즉 하느님 "그분"을 관상하는 길로 들어설 수 있게 된다. 이리하여 영혼은 스스로의 힘만으로 성취할 수 있었던 단계를
초월하면서 드높은 곳으로 나아가게 된다. 영혼은 하느님의 자비에 의지하여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어야만 이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영적 존재들이란 원래는 서로간에 차이 없이 모두 동등한 정신들로서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를 관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정신들이 이같은 지복의 상태에 싫증을 내고 타락해 버린 것이다. 정신은 영혼이 되어 육신 안에 거주한다.
육신으로 말하자면 영혼의 타락을 정지시키고, 영혼이 육신을 벗어나 다시금 정신noesis으로 되돌아가 하느님을 관상할 수 있게끔
또다른 상승의 기회를 마련해준다. 오리게네스에 있어서 "참된" 세계는 영적 영역이지 물질의 영역이 아니기에 타락과 속죄의 드라마
또한 본질적으로 영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이같은 전제는 "강생하신 말씀", 즉 육신이며 물질의 세계에 강생하신 "말씀"에 대한
믿음과 잘 들어맞지 않는 것이다. 이는 오리게네스에게 있어서 문제점의 근원이다.
어휴 골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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