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니시우스는 초기 논문 [이교도 반박론]에서는 오리게네스의
신학에 충실한 학자였다. 그러나 [강생론]에서는 양상이 완전히 달라져 있다. [강생론]에서 영혼은 "무로부터 창조"되었으며 손상되기
쉬운 미약한 존재로서 타락하기 이전의 안정된 상태에서도 하느님의 은총에 좌우되고 있다. 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모습,
즉 손상되기 이전의 영혼이 지녔던 모습의 원형-"말씀"- 이 사람이 되시어 내려오시는 일(강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관상은
더이상 신성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미 거룩하게 된 영혼의 여러 활동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오리게네스에게서처럼 영혼은
관상하는 대상을 통하여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타나시우스에 의하면 "우리가 거룩하게 되도록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마음속에 모습을 그려볼 수 있도록 그분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스스로를 드러내
보여주셨다."[강생론]54 결국 영혼은 신성과 같은 본성을 지닐 수는 없는 것이며, 따라서 관상은 영혼을 거룩하게 해주는 활동이
아니다. 영혼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강생”의 결과이며 글자 그대로 은총이 베풀어진 행위인 것이다. 인간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하느님의 모습인 “말씀”과 같은 모습을 회복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는 “말씀”의 “강생”, 즉 “말씀”이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시어 우리의 타락한 상태로까지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아타나시우스는 말하기를 “영혼은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울”이라고 했다. 영혼은 하느님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라는 아타나시우스의 은유는 영혼과 하느님 사이에 실제로 닮은 점이
있음을 암시하면서, 자기를 인식하는 자체가 하느님을 알게 되는 길이라는 생각을 함께 견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영혼과 하느님
사이에 본래부터의 동족관계가 있음을 시사하지는 않았다. 거울에 비친 모습과 그 원형 사이에 존재론적인 연속성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 "신성을 가지게 된다”(theopoiesis)는 말은 영혼과 하느님 사이에 동족성을 회복한다는 뜻이 아니라,
영혼이 맑게 정화됨에 따라 더욱 분명하게 하느님을 반영한다는 것, 즉 하느님의 더욱 참된 모습이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는 플라톤 철학에서 익히 보아온 주제를 적용하면서도, “무로부터 창조"라는 교리의 근본적 의미에 대한 니케아 정통파의 기본 입장을
조금도 흐려놓지 않은 논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