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그린 2010. 5. 22. 21:56





지난 여름, 벼르고 별러서 없는 시간을 쪼개어가며 찾아간 영화.
엉성하게 자리를 채운 극장 안에 혼자 앉아 무지하게 재미있고, 진지하게 보았다. 
첫 느낌은 정말 오랜만에 천재를 만난 반가움이었다. 

감독이자 주연배우인 존 카메론 미첼(John Cameron Mitchell) ... 
그의 아이디어는 물론이고 자극적이면서도 설득력이 있는 표현의 자유분방함과
영화의 요란스러운 외형을 묵직하게 고정시키고 있는 그의 철학에 한동안 깊이 빠졌었다. 
"사랑은 반쪽을 찾는것"이라는,
플라톤의 [향연]에서 토론하고 있는 '사랑(eros)'의 본질에 대한 가지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다. 
동독에서 엄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주인공 한셀은 
어릴 때부터 오븐 속에서 몰래 미국의 록음악을 라디오로 들어왔다. 
'자궁이 칸트보다 위대하다'는 궤변(?)으로 철학에서도 낙제를 했다. 
미국인 장교를 알게 되어, 성전환수술을 받고 장교와 결혼하여 미국 땅에 발을 들여놓지만,
수술은 실패되어 1인치의 살점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그를 맞이한건 그 장교가 헤드윅을 버리기 위해 마련한 콘테이너박스 한 채.
더 어처구니 없는 일은, 그 해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이다. 
그걸 본 순간, 내 가슴도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영화는 너무나 담담하게 그 장벽을 무너뜨린다. 

그는 이렇게 이 세상 어느 구석에도, 어느 편에도 속할 수 없는 존재이다. 
독일인도 미국인도 아니고,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심지어는 인간도 동물도 아닌 존재. 오로지 신의 실수요, 운명의 실패작일 뿐이었다. 
더군다나 잃었다가 다시찾은 자신의 반쪽마저 자기를 저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자기가 작곡한 노래와 스타일 모두를 훔쳐간 지미 앞에서도 
그는 열등한 존재 그 자체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를 쫒아다니며 원망을 하고 화를 내다가도, 
자기의 반쪽이라는 믿음 때문에 잠깐이라도 함께 있음을 좋아하는 헤드윅은 정말 바보가 아닌가...?
여기서 그는 사랑을 운명이라고 믿는, 흔해빠진 속임수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가 지미와 대면했을 때, 
(이 장면을 다시 보고 정확히 확인하고 싶지만 아직...)
그는 자신이 받은 상처와 운명을 노래한다. 
하지만 지미는 이미 떠나버린 입장에서 그것은 모두 자기 몫이라는 투의 노래를 부른다. 
결국 지나간 과거와 상처는 되돌려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뉘앙스를 전달한다. 


아무튼.... 자신의 현실과 진실을 그제서야 직시한 헤드윅은 
다시 사람들 앞에 서서 분장했던 가발과 옷을 벗어던지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으로 서서 노래한다. 
물론 관객들로부터는 엄청난 야유와 토마토세례를 받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세례였다. 
자신의 운명과 상처난 과거를 모두 끌어안고 당당하게 다시 일어서기 위한 세례였다. 
부조리와 갈등이 시작되는 경계선에 끼어 그 어느곳에도 속할 수 없기에 
자기 존재의 정체성마저 상실했던 그는 이제 
그 모든 경계선을 아우르는 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진정한 인간이 되기위해, 결국은 자기의 결단이 요구되는 일이다. 
영화에 잠깐 나오지만, 미국 땅에 어설프게 살고 있는 한국 여인들,
한국인이어서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권력적인 경계선 밖으로 떠밀려 
소외된 사람들을 대신하는 목소리가 헤드윅의 영화 안에 배어있다.  
때문에 나는 수많은 경계선에 걸쳐져 있는 사람들을 기억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또 얼마나 많은 경계를 지으며 그 안에서 안주하고 
또 그 바깥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는지...
한동안 이 생각에 머물게 될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