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를 휘날리며
'태극기' 팬들이 이글을 보면 몰매를 맞을지도 모르지만
오늘,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끔찍한 장면들에 자주 눈을 감아서 그런가?
너무나도 자세하고 실감나게 전쟁의 처참한 광경을 묘사해주어서
눈을 감고 있어도 내가 마치 전쟁터 한복판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그게 그 영화의 전부랄까?
라이언 일병을 구하러 갔던 곳과 비슷한 전장에서
진석 일병을 구하기 위해 생명을 불사르는 형의 사랑에
쉴새 없이 눈물을 흘려야 마땅했겠지만,
생각하고 공감해볼 틈도 없이 들이대고 강요하는 그 '찐한 형제애'에
나는 끝내 설득당하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말 못하는 어머니와 공부시켜야 하는 동생을 위해
자기는 사라지고 모든 것을 희생해야 했던 장남의 비극과
'사상'이 뭔지도 모르는채 이 편 또는 저 편에 의해 희생되어야 했던 6.25의 비극...
이 두 가지는 말만 들어도 우리나라 사람 모두를 울릴 수 있는 주제인데,
영화에서는 그것을 둘러싼 전투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정작 말해져야 할 것은 전투씬이 차지한 80%의 나머지 안에서
요점만 간략하게 일러주는 방식으로 처리되고 만다.
관객과의 커뮤니케이션을 고민하기 보다
대중의 감성코드를 겨냥하여 엄청 비싸게 제조된 '메뉴'에
관객이 모두 감동을 받아야한다는 억지스럽고 일방적인 요구가
내 마음을 굉장히 불편하게 만들었다.
대학가서 출세하여 어머니를 편안히 모셔야할 임무를 띤
동생을 살리기 위해
자기 인생은 둘째치고 남의 인생까지 깡그리 짓밟아버리는
형의 단순무식하고 맹목적이며 병적인 자기 희생에
나는 차마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처럼 자기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모함을 두고
그것이 우리 민족의 필연적인 운명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빠진 '형제애'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똘똘하게 생긴 장동건이 아닌,
정말 한 가지 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바보같은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는 배우가
진태역을 맡았다면, 좀더 편안한 설득력을 지녔을지도 모르겠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버금가도록
케찹 튀기는 장면과 인해전술에만 엄청난 공을 들인 나머지
몹시 불친절하고 일방적인 대화술로 관객을 압도하려는 감독에게서
솔직히, 나는 더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앞으로 그는 더 많은 돈을 들여 더 큰 규모의 블록버스터를 만들고
국내사상 최대의 제작비를 갱신할 영화를 또 만들어내겠지만
글쎄...
대중을 극장표로 계산하는 시각만 조금 교정한다면
좋은 영화를 기대할 수도 있겠지.
며칠 전에 [올드보이]를 보았는데,
스토리 자체는 황당할지언정
끈질기고 집요하게 관객을 영화 안으로 끌어들이고
그렇게 밖에는 될 수 없었다고 믿게끔 만드는 감독의 솜씨에
정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태극기..]와는 상당히 대조적인 부분이다.
그래서 나는 박찬욱 감독에게 더 기대를 걸게 되는데,
다만, 그가 조금만 더 세상을 따뜻하게 보듬어 안아주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건네줄 수 있는 삶의 아름다움을 더 많이 발견하고
보여주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