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E D I A/영화관

천상의 소녀 - OSAMA

기린그린 2010. 5. 22. 22:35




"잊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용서할 수는 있다“는 넬슨 만델라의 경구를 자막에 새기며 
시작하는 영화 ‘천상의 소녀(원제:OSAMA)'는  탈레반 정권 하에 있던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정권을 장악한 탈레반군의 반여성정책으로 여성이 취직하거나 교육받는 것이 금지된 것은 물론
남자의 동행 없이는 외출조차 할 수 없는 이 나라에서 과부가 된다는 것은
곧 산채로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 다름이 없다. 
영화 초반부터 하늘색 부르카  부르카를 뒤집어쓴 여인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우리는 정치를 모른다.” “우리는 배가 고프다.” “일하고 싶다”고 피켓을 들고 외치지만, 
이들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최루탄과 물대포, 그리고 철망 안에 가두어 
사형장으로 끌고 가는 것으로 끝을 낸다.
(* Burqa: 챠도르의 일종인 부르카는 머리에서 발목까지 몸 전체를 가리고 눈 부위만 망사로 되어있는 아프가니스탄 여성 의상이다. 소련 침공군을 몰아낸 뒤 온건파와 내전을 거쳐 영토 대부분을 장악했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군은 94년 이후부터 철저한 반여성 정책을 펼쳤다.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은 집 밖을 나올 때는 친척 남성의 안내를 받아야하고 부르카를 반드시 착용해야 했다.)




  격한 상황에서도 감정이 배제된 시선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카메라는 
이제 그 모든 불행의 주인공이 될 열두 살 소녀 레일라에게 초점을 맞춘다. 
아버지는 카불 전쟁에서 죽고, 외삼촌은 러시아 전쟁에서 죽었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생계위협에 처한 할머니와 어머니는 레일라의 긴 머리카락을 자르고 남자로 변장시킨다. 
목숨을 걸고 자기 집에 소녀를 취직시켜준 아버지의 전우 덕분에 겨우 양식을 구하게 되지만,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길거리를 지나는 개만큼의 자유도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무장한 탈레반을 속이고 지나가는 남장 소녀의 발걸음을 뒤쫓는 공포와 압박은 
보는 이들의 심장마저도 곧 멈추게 만들 것만 같다. 
특별한 촬영기법이나 효과음이 없는데도, 그 어떤 공포영화보다도 더한 경악을 불러일으키는
그들의 현실이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책과 괴로움을 함께 불러온다. 




 살벌한 감시와 처벌만이 활보하는 그 사회에서 
남자 아이들은 유일하게 웃음을 누리는  특권층이기도 하다. 
그 소년들과 함께 군사학교에 소집된 레일라는 예쁘장한 얼굴과 높은 음색 때문에 
따돌림과 의심의 대상이 되는데, 소녀의 정체를 알면서도 친구가 되어준 에스판디는 
소녀에게 ‘오사마’라는 남자이름으로 불러주고 지켜주려 애쓴다. 
하지만 결국 여자라는 것이 발각되어 캄캄한 우물 속에 손을 묶어 매달아 놓는 벌을 받고, 
사형선고와 함께 감옥에 갇힌 오사마, 
그 아이의 유일한 꿈이자 환상은 제자리에서 줄넘기를 하는 것이다. 
기왕에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면서도 넓은 들판을 달리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하염없는 굴레를 넘고 또 넘는 줄넘기는 
아무데도 희망을 둘 수 없는 아이의 참담한 현실을 더욱 슬프게 강조할 뿐이다. 
 
사형장을 가득 메운 남자들의 침묵 앞에서 외국인 기자가 총살되고, 
계율을 어긴 여인들이 생매장되는 것을 보며 순서를 기다리는 오사마는 
마지막 순간에 색정 가득한 노인의 후처로 팔림으로써 목숨은 구하지만, 
그 또한 매일의 죽음을 되풀이하는 지옥으로 넘겨진 것과 다름없다. 
소녀의 모진 운명의 문턱에서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노인이 건네주는 선물은 크고 무거운 자물통 하나... 
울고 있는 소녀를 뒤로하고 느긋하게 목욕하는 노인을 멀찌감치 바라보며 
그 큰 고난의 인생들을 스크린의 어둠 속에 묻어두고 나오자니 
적잖은 혼란스러움과 괴로움을 감내해야 했다. 



이 영화의 소재는 감독이 탈레반을 피해 파키스탄에 망명해 있을 때 읽은 신문기사에서 따 온 것인데, 
여성교육이 금지된 아프가니스탄에서 한 소녀가 남장을 하고 학교에 다녔는데, 
결국 발각이 되어 소녀는 물론 학교장까지 체포되어 사형당했다는 이야기다.  
나를 더욱 놀라게 한 사실은 이 영화의 캐스팅에 얽힌 사연이다. 
주인공 오사마 역을 맡은 소녀 마리나는 실제로 거리에서 구걸하던 아이였고, 
그가 영화에서 보여준 불안과 공포는 연기가 아니라 몸에 밴 현실 그 자체라는 것이다. 
할머니와 어머니로 나온 여성들도 포로수용소에서 발탁되어 차별과 억압, 
가난과 불행의 산물인 그들의 인생을 그대로 영화 속에 담아내었다. 
그리고 외국 사람의 시선이 아닌 아프가니스탄 영화감독의 눈으로 담아낸 진실이기에 
그들의 호소가 더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정서는 하나의 드라마가 주는 감동보다 다큐멘터리가 전해주는 충격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회의를 품고 있다는 세디그 바르막 감독은 탈레반 정권이 물러난 이후에도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은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여성 백 명이 흘리는 피 눈물보다 기름 한 방울을 더 소중히 여기는 
자국의 현실을 개탄하는 감독에게 있어 영화는 즐길 수 있는 문화가 아니라 
부르카를 뒤집어 쓴 얼굴 없는 사람들의 대변자인 셈이다. 
영화를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인 책임에 충실하게 응답하는 감독의 소신에서 
모든 미디어가 문화산업의 결과이기 이전에 
진실을 소통하는 매개체라는 데에 진정한 가치가 있음을 읽게 된다. 
이 영화가 2003년 칸느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에 언급된 사실은 
얼굴 없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여주고,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외침을 들려주어야 하는 
매스미디어의 본질적인 사명을 일깨우는 것이기도 하다.    



나에게 있어 영화는 세상을 보는 하나의 커다란 창문이다. 
물론 제작자들의 의도와 사상과 이익이 깊이 개입된 인위적인 세상이긴 하지만, 
그것을 통해 나와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생각과 대화를 나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선택하는 일은 사뭇 진지한 일이 되기도 한다. 
영화 ‘천상의 소녀’를 보는 느낌은 마치 내 이웃에 사는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오락과 돈벌이에 편중된 미디어들의 요란한 소음 속에서 
‘천상의 소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듣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우리의 눈과 마음까지 사로잡는 휘황찬란한 이미지의 향연 앞에서 
‘천상의 소녀’가 하소연하는 눈빛에 눈길을 주기란 정말 힘든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소녀의 작은 외침과 두려움 가득 찬 눈망울은 
저 멀리 아프가니스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이웃에 모습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힘도 없고, 들어주는 이도 없어서 보이지 않는 부르카를 쓰고 살아야만 하는 
억울한 이웃들의 이야기는 때로 나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은 함께 희망을 만들어가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어떤 슬픔과 절망에 빠져있을 때, 굳이 해결책까지 바라지 않더라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누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자체로도 큰 위로와 힘이 얻게 되는 체험은 아마도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90년대 이후 ‘지구촌’이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우리나라는 ‘세계화’를 지향하며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런데 우리가 지향하며 달려온 세계는 몇몇 선진국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세계화’의 목표점인 ‘세계’는 앞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둥글게 감싸 안아야 할 하나의 땅이고 하나의 인류이다. 
부자 이웃의 풍요로운 삶을 따라가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가난한 이웃의 불행도 함께 돌보는 마음을 갖는 것이 진정한 세계화의 첫걸음이 아닐까? 


이 영화에서 내 가슴에 가자 오래 남는 장면은 대여섯 살 된 한 아이가 
불구인 두 다리를 이끌고 절뚝거리며 긴 병원복도를 걸어가는 뒷모습이다. 
한참 동안 카메라의 시선이 머물렀던 그 아이의 모습에서 
한 쪽이 어느 한 쪽을 억압하면 결국 둘 다 성장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패배만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서로 다름을 풍요의 원천으로 삼기보다 차별의 빌미로 이용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아프가니스탄의 억압받는 여성 뿐 아니라 함께 피폐해져가는 남성들의 모습에서 그 답을 볼 수 있다. 

영화에서 할머니가 레일라에게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는 여성의 자유를 빼앗은 
남자들의 이중적인 노고를 들려주는 것 같다.  
“옛날 옛적에 한 소년이 살았단다. 그 애는 일을 해서 여동생들을 부양해야 했지. 
일하기가 싫었던 그 아이는 여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단다. 
어느날 천사가 나타나서 무지개 아래로 걸어간다면 여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했지. 
남자가 거길 걸어가면 여자가 되고, 여자가 지나가면 남자가 되는 거야.” 
하지만 서로 함께 일하는 법을 일찍이 배웠다면, 
누구든 무지개를 기다리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다. 
(2006. 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