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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래쉬(Crash)

기린그린 2010. 5. 22. 22:44



‘코시안(Kosian)’이라는 단어를 요즘 신문이나 방송에서 심심치 않게 접하게 된다. 
코시안은 한국인(Korean)과 아시아인(Asian) 사이에서 태어난 2세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에 대한 배려와 정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점점 공론화 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코시안 문제와 관련해서 한국 혼혈인들의 삶을 보도한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는데,
아주 어릴 때부터 차별과 핍박을 견뎌온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은 
지금도 내 가슴에 무겁게 남아 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땅만 보고 살았던 흑인 혼혈소녀의 눈물을 보며, 
그 짙은 어둠에 무관심했던 내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영화 <크래쉬>를 보면서 나는 또 한 번 알게 모르게 누군가를 차별하고 억압하는 
나 자신을 부끄럽게 돌아보게 되었다.   

올해 각종 시상식과 평단에서 극찬을 받은 영화 <크래쉬>는 폴 해기스 감독의 작품으로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영화다.  
미국사회의 가장 민감한 문제를 그렸기 때문에 어쩌면 남의 일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남 아시아계 노동자들, 우리 농촌총각과 결혼해서 태어난 필리핀, 
베트남계 혼혈아들의 차별문제가 점차 심각해지고 있는 우리 현실을 비춰볼 때 
분명 남의 문제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인종 전시장’이라고 할 LA를 무대로 한 이 영화는 9?11 테러 이후 평범한 시민들에게 퍼져있는
불안과 편견,  두려움과 피해의식이 폭력으로 치닫는 과정을 세심하게 뒤쫓고 있다. 




영화는 한밤중 자동차 추돌 사건 현장에 있던 흑인형사의 의미심장한 독백으로 시작한다. 
“접촉의 느낌이야, 어디건 도시를 걷노라면 사람들을 스쳐 지나게 되지. 
사람들이 부딪쳐 오기도 하고... 하지만 LA에선 아무도 건드리지 않아. 
우린 언제나 금속과 유리로 된 차 안에 갇혀 있으니까... 
내 생각엔 우리가 그런 접촉을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서로의 차와 충돌함으로써 뭔가를 느끼는 것 같아."

사건이 일어난 LA 고속도로는 각각의 인종이 게토를 이루며 사는 지역들을 연결해 주는 길인
동시에 모든 이가 평등하게 공유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그곳에서 벌어진 추돌사고와 총격사건은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현실을 집약한 
하나의 은유로 자리 잡는다.

영화는 미국사회의 주류인 백인들의 시선에 담긴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이 커다란 갈등의 축을 이룬다. 
그러면서도 유색인종의 지지를 얻기 위해 비리흑인형사를 영웅으로 만드는 백인 검사, 
남편이 보는 앞에서 흑인여성을 성추행하는 백인 경찰, 
옆에 앉은 사람이 흑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위협을 느껴 급기야는 총으로 쏘아버리고 마는 백인 등 
비정상적인 우월감 밑에 감춰진 비열함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러나 백인들이 가진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차별받는 쪽인 소수인종끼리도 백인 기준의 편향적인 잣대에 근거해서 서로를 판단하고 단죄한다. 
차별의 피해의식과 콤플렉스에 젖어서 백인의 자동차를 강탈하는 흑인 청년들,  
‘오사마 빈라덴 족속’이라고 오해받는 이란 사람, 자물쇠를 고쳐주면서도 도둑으로 의심받는 
히스패닉 남자, 동남아인들을 팔아넘기는 한국 남자 등의 모습은 
그 누구도 소수 인종을 바라보는 편견의 사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는 겉으로 보이는 차별 현상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개개인의 내면적인 맥락에 접근한다.   



병든 아버지를 간호하는데 지친 백인 경찰의 괴로움은 순찰 중 흑인 유부녀에 대한 
성추행으로 변질되고, 출세지향적인 남편 곁에서 고독과 소외의 극에 달한 백인 여자는 
유색인들에게 온갖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다. 
LA에 살고 있다는 공통점 말고는 피부색도 나이도 모두 다른 그들의 일상은 
이렇듯 자동차 추돌사고 못지않게 격렬하고 연쇄적인 충돌의 현장이 된다. 
하지만 그들의 충돌을 경험하면 할수록 마음으로 감지되는 것은 피부색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각자의 내면을 사로잡고 있는 소외감과 두려움, 집착과 편견, 그리고 외로움이다.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크래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와 똑같은, 그래서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착한 사람들에 대한 영화이다. 인종이나 계급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느끼는 상처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와 관련해서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씬은 문을 여닫는 것인데,
이쪽에서 닫으면 저쪽에서도 닫아버리는 편집술이 수시로 사용된다. 
문을 그냥 열고 닫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절교한 듯 쾅! 하고 닫아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부서진 문을 수리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자물쇠만 고치려고 한다. 
여기에 나오는 이란 상인이야말로 자물쇠만 바꾸고 문은 고치지 않는 바람에 
결국 가게를 몽땅 털리는 비운을 겪는다. 하지만 온갖 편견과 의심으로 자존심마저 도둑맞고 
초라해진 마음에 비하면 그 손해는 아무것도 아니다. 
소통의 공간을 구분 짓고 제한하는 문은 사람의 마음에도 똑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는 쉽게 상대방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그것이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철통같이 문을 닫아건다. 
여기에서 ‘틀리다’라는 단어의 이중적 의미를 한 번 짚어보고 싶다. 
‘틀리다’라는 단어는 우리말에서 두 가지로 쓰이는데, 하나는 ‘다르다(different)'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나쁘다, 혹은 옳지 않다(wrong)’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틀리다’는 말은 조심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나와 틀리다”는 ‘차이’의 의미가 자칫 “너는 틀렸어”라는 단죄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같은 영어를 쓰면서도 ‘A’가 ‘A’라는 의미로 전달되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무상적인 친절은 음모로 받아들여져서 예기치 않은 분노를 일으키고, 
사심 없는 웃음은 음흉한 비웃음으로 뒤틀려서 전달된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언어 대신 고함과 총부리로 의사소통을 대신한다. 
상대방이 아무리 마음을 열고 먼저 다가온다 해도 내 마음이 편견과 고정관념이라는 
자물쇠를 치우지 않는 이상 그것은 위협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도통 대화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고 친교를 꿈꿀 수 없는 곳이라면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행히도 이 영화는 이런 지옥상태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폭력적인 편견과 충돌이 빚어낸 상처는 다시금 선한 의지의 만남으로 치유되고, 
그 만남은 서로에게 가한 상처를 감싸주는 화해의 강을 이룬다. 
마지막에 들려오는 “In the Deep"이라는 노래는 세상을 부드럽게 덮어주는 눈송이처럼 
쓸쓸한 사람들의 어깨를 다독여주고, 입가에 머금은 엷은 미소를 더욱 환하게 비춰준다. 그
래서 이 세상은 거칠고 힘들지만 ‘너’가 있어서 살만한 곳이라고... 나도 모르게 고백하게 만든다.   



우리가 아는 것만 가지고 세상과 사람을 받아들이려 한다면, 신앙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더군다나 세계의 화약고라고 불리는 팔레스타인 출신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따르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예수님 또한 지역차별, 신분차별의 희생자셨다. 
나자렛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기적을 행하셔도 그분을 ‘목수의 아들’로만 보려는 
고향 사람들은 끝내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사마리아에서도 그랬고, 심지어 당신과 동고동락한 제자들에게도 경계의 대상이 되셨다. 
그러나 그분은 지역이나 신분뿐 아니라 율법과 형식, 
그 모든 경계를 초월한 만남을 이끌어내셨다. 
이방인과 소외된 사람을 먼저 불러주셨고, 형식적인 율법의 경계를 허무심으로써 
세리와 죄인을 공동체에 초대하셨다. 
그분의 마음에는 자물쇠는커녕 아무런 문도 달려있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그분 안에서 편히 쉬고, 생명을 얻는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에페소 2,14-19)


-[성서와 함께] 4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