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E D I A/책방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기린그린 2010. 5. 25. 13:43

   

처음 수녀원에 들어와서 낯선 자매들과 부대끼며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갈 때, 

우리는 저마다 어떤 고결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한 곳에 모였지만 그 방법은 천차만별이었다. 

그 때문에 도반(道伴)으로 불리어야 할 사람들과 원수처럼 지내고 

공동체라는 것에 회의를 느끼는 일도 허다했다. 

그 때 우리는 장 바니에의 ‘공동체와 성장’이라는 책을 읽으며 

어떻게든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어보려 노력했고, 

뾰족하게 자기를 내세웠던 모서리들을 점차 무던한 모양으로 다듬어갔다. 

그 시간은 정말 길었던 것 같다.

이제 나를 비롯한 우리 동기들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이 자기를 내어놓고 봉사해야하는 자리에 와있다. 이런 시점에서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을 통해 듣게 되는 장 바니에의 체험담은 

다시 한 번 성장을 위한 깊은 깨달음을 전해준다.


  예수님이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잡히시던 날, 그분은 제자들의 발을 하나하나 씻어주셨다. 

그러고 나서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요한 13,14-15)라고 말씀하셨다. 

이로써 예수님은 제자들 각자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시며 겸손한 봉사가 당신 메시지의 핵심임을 드러내셨다. 그리고 우리도 당신의 제자가 되고 당신 나라에 속하고 싶다면

 당신의 모범을 따라 서로의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것도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발 뿐 아니라, 나를 곧 배반할 이들의 발까지도 

씻어줄 줄 알아야 한다고 하신다. 그것이 당신을 닮는 길이라고.


하지만 고개를 숙여서 타인의 맨발을 본다는 것조차 얼마나 상상하기 힘든 일인가? 

게다가 그 상대방이 내가 해주는 봉사를 알아보기는커녕 

나에게 더 많은 것을 달라고 떼를 쓴다면  그의 발 앞에 엎드리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여겨질 수 있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 배려했건만 그것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상대방을 볼 때, 

착한 마음은 어느새 악한 기운을 띠고 분노로 변할 수도 있다.

사실 요 며칠 동안 내 마음은 이런 과정을 겪어내느라 아주 힘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사랑으로 섬기려던 대상을 통해 나의 그림자와의 만났기 때문이다. 

내 앞에 무수히 놓여있는 선악의 갈림길에서 ‘너는 결코 선하지 않다’고 

누군가에게 놀림당하는 것 같아서 몹시 우울했다. 

그런데 이 책의 첫 부분에 쓰인 다음 구절이 자꾸 내 마음을 끌어당기고 다독거린다.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사람들은 또한 우리 안에 가장 어둡고 추한 것이 무엇이지 깨닫게 한다. 

그들의 눈물과 분노, 끊임없는 요구와 우울증은 바로 우리 자신의 아픔과 폭력을 드러낸다. 

참으로 우리가 인간다운 사람으로 성장하려면 우리 마음속에 있는 증오와 폭력, 

우리가 부끄럽게 여겨 숨기려는 모든 것을 정직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정말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내 마음의 가장 어둡고 추한 곳은 

바로 내가 외면하는 사람들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 앞에서 정직할 때, 그를 미워하지도, 나를 포장하지도 않게 된다. 

나 자신이 선함 자체이신 하느님이 되려하기 보다 

그분의 선한 빛 속에 초대받은 것만으로 감사하게 된다.  


(2010. 03.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