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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삶을 만나다: 반시대적 철학. 타자

기린그린 2010. 8. 13. 20:07

철학 삶을 만나다

 

강신주 저/ 이학사 / 2006

 

삶을 낯설게 만드는 철학 이야기,

삶을 하나의 헹글라이더 비행으로 비유하며 마무리짓는 강신주님의 철학 이야기는 

오늘은 어떤 바람을 맞이할지... 그 바람에 몸을 맡길 때 더 자유롭게 비행하며,

그 바람이 데려다 주는 곳에 즐겁게 머물 수 있다는 것... 을 깨닫게 해준다.
바람이 많이 부는 오늘, 정말 기분좋은 이야기로 들린다.
미래, 특히 열린 마음으로 타자를 맞이하고, 그와의 만남을 소홀히 여기지 말 것을 더 다짐하게 됐다. 

그리고 사랑과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 국가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은

그동안 내가 들었던 다른 설명보다 훨씬 쉽고 명료하다. (신자유주의와 산업자본주의 논리)  

 

프롤로그 11

제1부 철학적 사유의 비밀
   1. 사유를 발생시키는 조건들 21
   2. 철학적 사유와 인문학적 경험 50
   3. 철학의 은밀한 두 가지 흐름 78

제2부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기
   4. 사랑 그리고 가족 이데올로기 113
   5. 국가라는 가장 오래된 신화 138
   6. 살아 있는 형이상학으로서의 자본주의 169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7.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 205
   8.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기 234
   9. 타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 268

에필로그 297

 

철학의 반시대성

 

들뢰즈는 반시대성이라는 니체의 심오한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무척이나 공을 들입니다.
'반시대성'이란 개념은 철학의 힘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참된 철학과 거짓된 철학을 구별하는 진정한 잣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그는 [에레혼 Erewhon]이라는 풍자소설로 유명한 영국 소설가, 새뮤엘 버틀러(1835-1902)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에레혼Erewhon이란 단어는 버틀러가 만든 조어입니다.
이 단어를 거꾸로 표기하면 'nowhere', 즉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 됩니다.
들뢰즈가 버틀러의 에레혼이란 개념을 좋아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가 생각했을 때 철학은 'nowhere'라는 글자가 함축하는 복잡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요.
여러분도 어디선가 들어보았겠지만, 'nowhere'라는 표현은 'no-where'이지만 동시에 'now-here'이기도 합니다.
'no-where'라는 것은 반시대적 철학이 아직 공동체에 받아들여지 않았기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now-here'라는 것은 반시대적 철학이 '지금 바로 이곳'을 문제 삼고 넘어서려 한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참된 철학은 항상 반시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것은 철학이 'now-here'와 'no-where'라는 두 측면을 항상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철학의 비판적 힘을, 후자는 철학의 상상력의 힘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판은 우리 현실이 어떻게 정당화되는지, 그리고 그 정당화의 방식이 옳은지의 여부를 숙고하는 작용입니다.
반면 상상력은 그것을 통해 다른 현실, 다른 'now-here'를 꿈꾸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상력과 비판의 두 측면은 반시대적 철학의 두 얼굴입니다.
그래서 이중 어느 하나가 없다면 다른 하나도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타자란 무엇인가?

타자란 우선 나와는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진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타자를 사랑하게 될 수도 혹은 미워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의 삶의 규칙이 나와 완전히 동일하다면,

우리는 그를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의 힘이란 바로 '차이'의 힘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타자는 나의 미래!

타자는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친숙하고 편안한 세계에 낯섦과 불편함을 가지고 오는 무엇입니다.
타자가 규칙적이로 편안한 나의 삶을 불규칙적이고 불편한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이유는,
그 타자가 나와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의 삶을 가장 낯설게 만드는 사건은 바로 타자에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도대체 그가 어떤 삶의 규칙을 따르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니까요.
나와는 다른 삶의 규칙을 가졌기에, 나는 타자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가 모든 것, 심지어 빛마저도 흡수해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는 블랙홀과 같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타자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신비스런 일입니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를 "하나의 신비와의 관계"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타자와의 강렬한 첫 만남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순간이

우리에게 '순수한 현재 pure present'를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타자와의 만남만이 우리에게 시간이란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시간이란 시계 속에 똑같은 패턴으로 회전하는 시침이나 분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란 기본적으로 단절과 변화의 계기를 가리킵니다.
타자와 마주친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도망친 새가 다시 내 품으로 날아와 안기는 듯한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나에게 '바로 지금'이라는 시간, 즉 순수한 현재가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누군가를 갈망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나는 이제 어제의 내가 아니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런 순수한 현재를 통해 나에게는 과거란 것이 생기게 되는 셈이지요.
그러나 순수한 현재는 나에게 이처럼 과거를 안겨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타자와 마주친 이 사건이 바로 우리에게 미래를 가져다준다는 점입니다.
나는 내일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수도 있고,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내일을 설렘 반, 두려움 반의 심정으로 기다리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나에게 미래라는 시간이 찾아오게 됩니다.
결국 타자와의 강렬한 첫 만남은 나에게 충만한 시간 전체를 다시 선물로 제공해주는 셈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레비나스가 타자와의 관계를 시간의 계기로 사유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
처음엔 누구나 "당신이 지금 무엇을 생각하는지 나는 전혀 모르겠다"고 토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우리는 얼굴만 보아도 어느 정도 상대방의 기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불편함과 낯섦의 경험이 이처럼 편안함과 친숙함의 경험으로 변화되는 과정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타자와 만나서 사랑을 나눔으로써 나는 전혀 다른 나로 변화하게 됩니다.
타자와 조우하기 이전의 나는 타자와 만나 그에게 자신을 맞춤으로써 질적으로 전혀 다른 내가 되기 때문입니다.
타자와 마주친 그 순간, 우리는 자신이 어떻게 달라질지 예측하거나 기대할 수 없습니다.
기대한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현재 자신의 생각을 미래에 투사한 것에 불과하겠지요.
그러나 레비나스에 따른다면, 그것은 단지 "미래의 현재"일 뿐 "진정한 미래"는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어떻게 변할지, 즉 자신이 미래에 어떻게 생성될지 미리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가 마주친 타자에게 달려있는 것이니까요.
이 때문에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야말로 "미래와의 관계"라고 이야기 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