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E D I A/책방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기린그린 2010. 8. 15. 17:29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저/ 동녘

 

목차

들어가는 글 | 프롤로그

1. 기쁨의 연대 - 네그리와 박노해

노동 해방에서 화엄의 세계로 /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아이러니 / 다중의 정치와 사랑의 세계

2. 언어의 뼈 - 비트겐슈타인과 기형도

어느 시인의 고독한 죽음 / 언어에 감추어진 다양한 맥락 /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

3. 사유의 의무 - 아렌트와 김남주

근면이 미덕일 수 있을까? / 이웃 아저씨처럼 너무나 평범했던 아이히만 / 사유는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이 아니라 의무이다!

4. 삶의 우발성 - 알튀세르와 강은교

다정히 몸을 부빌 때 물은 어떤 소리를 내는가?/떨어지는 빗소리에서 철학자가 성찰한 것 / 우발성의 철학 혹은 마주침과 지속의 논리

5. 너무나 인간적인 에로티즘 - 바타이유와 박정대

시인이 서럽게 그리워하는 것 / 금기도 없다면 에로티즘도 없다! / 결혼, 성(性), 그리고 에로티즘 사이에서

6. 소비사회의 유혹 - 벤야민과 유하

욕망의 집어등! / 벤야민의 미완의 기획,‘ 아케이드 프로젝트’ / 백화점, 종교적 도취에 바쳐진 사원

7. 무한으로서의 타자 - 레비나스와 원재훈

은행나무 아래서 작아지는 시인의 마음 / 유아론을 넘어 타자에게로 / 타자 없이 내일도 없다!

8. 망각의 지혜 - 니체와 황동규

신분증에 다 담을 수 없는 꿈 / 행복과 희망을 가져다주는 망각의 힘 / 낙타에서 사자로, 마침내는 아이가 되어라!

9. 미시정치학 - 푸코와 김수영

4.19 혁명의 뒤안길에서 고뇌하는 두 시인 / 민주주의 적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 / 구성된 주체에서 구성하는 주체로

10. 대화의 재발견 - 가라타니 고진과 도종환

‘접시꽃’ 같았던 사랑으로부터 ‘가구’ 같은 사랑으로 / 고진이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배운 것 / 사랑 혹은 타자로의 위험한 도약

11. 밝음의 존재론 - 하이데거와 김춘수

촛불이 켜질 때 드러나는 것들 / 세계에 개방되어 있는 존재, 인간! / 잃어버린 존재를 찾아서

12. 주름과 리좀의 사유 - 들뢰즈와 최두석

추운 겨울 새벽 버스 창에 피어난 성에꽃 / 누구에게나 고유한 주름은 있다! / 주름에 대한 통찰에서 리좀의 철학으로

13. 애무의 비밀 - 사르트르와 최영미

비극적 사랑의 씨앗, 자유 / 사랑에 빠질 때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 육체가 살로 태어날 때

14. 작고 상처받기 쉬운 것들 - 아도르노와 최명란

아우슈비츠에서 돌아와 밥을 먹고 연애를 하며 /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 동일성(identity)의 사유를 넘어 성좌(constellation)의 사유로

15. 해탈을 위한 해체론 - 데리다와 오규원

죽고 난 뒤의 팬티를 부끄러워한 어느 시인 / 죽음이 없다면 살아있을 수조차 없다 / 해체에서 해탈로

16. 미래 정치철학의 화두 - 아감벤과 한하운

벌거벗은 생명의 자리에 서서 / 생명정치(Biopolitics)의 등장 / 민주주의의 아포리아를 넘어서

17. 육화된 마음-메를로 - 퐁티와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있는 섬 / 역사와 육체로 얼룩진 나라는 주체! / 고독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고독해지는 것

18. 포스트모던의 모던함 - 리오타르와 이상

미쓰코시 백화점을 노래했던 모던보이 / 모던하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 모던의 동력, 포스트(Post)!

19. 사랑의 존재론적 숙명 - 바디우와 황지우

기다림, 기다림, 그리고 기다림! / 사랑이란 과연 하나가 되는 것인가? / 사랑,‘ 둘’이 만드는 무한한 경험!

20. 인정에 목마른 인간 - 호네트와 박찬일

시인이 차를 몰고 강물에 뛰어든 이유 / 타자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인간의 욕망 / 물화의 세계를 넘어 인정의 세계로

21. 한국 사유의 논리 - 박동환과 김준태

도시 너머에서 발견한 희망 / 도시 밖의 생명과 사유의 논리 / 항상 이미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넘어서 있던 한국적 사유 


 

[철학, 삶을 만나다]에 이어 강신주 님의 이야기를 계속 듣는다.
이 책은 정말 앞에서 친절하게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의 강의를 듣는 것 같다.
듣는 사람의 이해 수준과 반응 과정을 거의 정확하게(?) 헤아려서 무척 어려운 것 같은 이야기를 참 쉬운 말로 풀어준다.
끝을 보니, 상상마당에서 진행된 '현대 철학의 속앓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다시 정리한 것이라고 밝혔다.
나에게는 여전히 난해하고 어렵게만 다가왔던 시와 생전 처음 들어보거나 언뜻 이름만 본 적있는 철학자들을
한꺼번에 만나는 일을 과연 소화해낼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선생님의 친절한 설명으로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사유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내가 사는 환경에 대해 부정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던 몇 가지 문제들을
좀더 명료하게 정리하고, 앞으로는 다르게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되었다는게
무엇보다 큰 독서의 보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전체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해서, 공동체와 사회에 대해서, 타자와 사랑에 대해서...
정말 꼭꼭 씹어서 살고 싶은 이야기들이 빼곡하게 표시된 책갈피처럼 즐비하게 펼쳐져 있다.
책을 가지고 있으면서 간간이 들여다보면 더 좋겠지만, 우선 몇 가지만 기록해두고 싶다.



* 대화의 재발견_가라타니 고진과 도종환

 

 

가구 / 도종환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

놓여 있다 장롱이 그렇듯이

오래 묵은 습관을 담은 채

각자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있는 일을 하곤 한다

어쩌다 내가 아내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내의 몸에서는 삐이걱하는 소리가 난다

나는 아내의 몸 속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잊어버리고

돌아 나온다 그러면 아내는 다시

아래위가 꼭 맞는 서랍이 되어 닫힌다

아내가 내 몸의 여닫이문을

먼저 열어보는 일은 없다

나는 늘 머쓱해진 채 아내를 건너다보다

돌아앉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는 방에 놓여 있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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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은 '공동체 community'와 '사회 society'를 구분합니다.
그에 따르면 공동체가 '하나의 언어 게임으로 닫혀있다'면,
사회란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언어 게임이 마주치고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에서는 겉으로는 대화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독백monologue만이 이루더지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동일한 삶과 언어의 규칙만이 통용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고진에게 "사회적이라는 것은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의 교환-커뮤니케이션- 관계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는" 것이었지요.
여기서 우리는 사랑이란 감정이 과연 어느 경우에 발생하는지 숙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은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회에서 발생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사랑의 감정은 공동체에서는 발생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타자, 즉 다른 공동체에 속한, 혹은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매력으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사랑이란 감정은 삶의 규칙이 다르기에 내가 정확히 알 수 없는 타자에 대해 

위험한 도약 혹은 비약을 감행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사랑이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간이 고독한 독백의 세계를 벗어나서 불안하지만 풍요로운 대화의 세계로 뛰어드는 존재라는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란 감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에 주목합니다.
'우리는 타자를 알아서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타자를 알아간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비록 상대방을 다 알지 못하지만 그 상대를 향해 자신을 던지는 이런 목숨을 건 위험을 감행한다는 점에서, 

타자에 대한 사랑의 감정에 모든 철학자들이 한 번쯤은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 사랑을 통해 타자를 알아가는 과정은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의 상이한 삶의 규칙이

 제3의 삶의 규칙으로 새롭게 연결되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지요.
두 사람이 새로운 삶의 규칙을 공유하게 되었을 때, 이것은 두 사람이 사회가 아니라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연애가 '사회적인 것'이라면 결혼은 항상 '공동체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결혼에 골인하면 상대에 대한 위험한 비약은 점차 사그라듭니다.
더는 상대를 조심스럽게 알고자 하는 긴장감이 없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둘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자만심이 조금씩 생겨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공동체를 다시 보게 하는 구절이다.
사랑하자 사랑하자 하면서도 그것이 의지적인 외침으로만 사라지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다름을 발견하고 그것과 대화할 수 있어야한다.
우린 생각이 같으니까... 서로 아니까...라는 것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도 되겠다라는 체념과도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