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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 비평수업

기린그린 2011. 7. 2. 17:07


사진이 가장 표현하기 힘든 매체 가운데 하나인 까닭은 시각 매체로서 사진이 독특하고 강렬한 묘사의 특성을 가진 동시에 

바로 이 특성 때문에 사진의 내용은 객관적 사실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 점이 바로 사진의 역설이다. 

나는 양극단에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던 사실주의와 추상주의가 실은 조화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이치를 이해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일단 이 역설을 받아들이자 무어가 심오한 것이 내 마음바닥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

사실과 추상의 조화를 경험한 또다른 예는 워커 에반스walker Evans의 사진을 볼 때였다. 

그가 유명한 다큐멘터리 작가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긴 했지만, 

나는 에반스가 가장 위대한 20세기 추상주의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에반스의 사진을 거꾸로 보면, 그 안에 담긴 건물들의 윤곽이 만들어내는 추상적인 느낌이 더욱 뚜렷이 다가온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은 추상적인 형태를 먼저 보기 위해 그의 밀착인화지를 거꾸로 보며 편집을 하곤 했다. 

많은 사진가들이 주제의 디테일보다 먼저 사진의 형태, 공간,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밀착인화보다는 필름을 보며 편집에 들어간다. 

예술은

추상 <--><--><--><--><---> 사실 

사이의 긴장감 속에 살아 있다. 

이는 한스 호프만Hans Hoffman의 '밀고 당기기push-pull' 개념과도 비슷하다. 

이 개념은 1950년대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p.27-28)


*** 비평 수업*** (p.103-106)

나는 배움에는 두 가지 과정이 있다고 본다. 

첫째, 갓 태어난 이를 빈 백지나 빈 항아리로 가정한다. 이때 배움이란 경험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이며, 우리는 이를 교육이라 부른다. 즉 텅 빈 종이와 항아리에 무언가가 채워지는 것이다. 종이에 쓰인 글의 수준이 높으면 '훌륭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지식을 습득하는 개인의 능력은 무척 다양하며, 분야에 따라 지능, 욕구, 재능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두번째 이론은 사람은 태어날 때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배움이란 어렴풋이 느끼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나가는 과정이다. 우리가 심오한 사항이나 개념을 접했을 때 전혀 생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마음에 와 닿는 이유를 두번째 이론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다. 이때 교육이란 지식 습득의 과정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을 드러내고 닫혀 있던 뚜껑을 여는 과정이다. 

... 나는 수업 시간에 이 두 이론의 핵심을 매우 구체적으로 활용한다. 내 비평 방식은 두번째 이론에 바탕을 둔 것으로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목적지가 정해져 있으며,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열린 마음과 지성으로 작업을 계속하여 반드시 이 목적지를 찾아내야만 한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일단 이 전제를 받아들이면, 남은 문제는 선생이 수업 시간에 학생들 한 명 한 명에게 제대로 방향을 찾도록 어떻게 도움을 주는가 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관한 것이다. 

첫째, 선생과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비평이 가장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는 원형무대를 만들어야 한다. 이 무대 위에서 매우 엄격하게 지켜야 할 몇 가지 규칙과 원칙이 있다. 

- 무례하게 굴지 않는다.

- 경쟁을 조장하지 않는다.

- 예술가에게 작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관해 묻지 않는다.(비평은 심리치료가 아니다.)

- 수업에 참가할 학생들이 직접 토론할 작품을 고른다. 

자신의 작품이 토론 대상이 되었을 때, 작업을 한 학생은 토론의 초기 단계에서는 작품에 대한 사실을, 이를테면 사진을 찍은 장소, 렌즈나 카메라의 종류 같은 질문에 대해서만 답을 하도록 한다. 작품의 의도, 내용,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해선 반드시 대답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나머지 학생들은 무슨 말이든 해도 된다. 미적, 정치적, 예술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자신의 꿈, 환상, 무심코 떠오른 연상들처럼 작품에 대한 것이면 뭐든 괜찮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 다른 학생들의 견해를 충분히 듣고 난 후, 만약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다면 얼마든지 해도 되고 토론은 길게 연장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선생의 태도는 겸손해야 하고, 토론에 참여하는 한 사람으로 머물러야 한다. 

비평을 하는 유일한 목적은 학생들에게 작품에 대한 통찰력을 심어주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될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태도가 개개인의 작품제작에 반영되며, 스스로 방향을 찾는 데 많은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그때 당신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한 것이다. 토론에 참가한 학생들뿐만 아니라 특히 선생이 주의해야 할 점은 사실과 견해의 차이를 뚜렷하게 구분하는 것이다. 이 차이를 뚜렷이 하면 토론의 폭은 한층 더 넓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