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하느님은 좋은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월등한 존재로 우리가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와 아주 가까이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목소리를 들으실 수 있고 언제나 가까이 갈 수 있는 분입니다.
나를 위해 얼마든지 시간을 낼 수 있습니다.
아기가 되어 구유에 누워 계신 분,
나와 언제까지나 인간으로 계실 수 있을 만큼 시간이 많은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하고 의심합니다.
우리는 진리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믿기를 거부합니다.
우리가 대부분 경험한 바에 따르면 진실은 잔인하고 추합니다.
그래서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 때 우리의 의심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려합니다.
진리와의 만남은 우리를 고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시키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세상은 성탄의 기쁨을 경축하는 우리를 비웃는 것입니다.
만일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빛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더러운 땅만 남습니다.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사실 베들레헴에 오실 때부터 우리는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외면하고 허울 좋은 절망을 선택합니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자신의 구원을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교만합니다.
우리의 교만이 하느님께 문을 닫았습니다. 그래서 형제들한테도 문을 닫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뵙기에 교만합니다.
헤로데 임금과 그의 신하들에게 일어난 일이 우리한테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교만을 이기기 위해 아기가 되어 오셨습니다.
어쩌면 권능과 지혜 앞에서 우리는 더 쉽게 무릎을 꿇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항복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우리를 교만에서 해방시켜 진정한 자유를 선사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오늘의 기쁨이 우리 마음을 흠뻑 적시도록 허락합시다. 착각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참으로 높은 진리는 아름답습니다.
그분을 찾는 것은 참으로 경사입니다.
그분은 참으로 좋은 분이십니다.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목자들이 마구간에 다녀와 한 말일수도 있고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의 그 밤을 기억하며 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요한 사도가 주님과 만남을 기억하며 한 말입니다.
우리 또한 신앙인으로서 그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믿는 사람은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 보았습니까?
혹시 장님이 된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 보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밖에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의 모습에만 맞추어 보는 것을 아닐까요?
오늘의 신비가 우리 눈을 뜨게 하도록 허락합시다.
그래야 볼 수 있는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성베네딕토 16세 강론집 [성탄] p.8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