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T U D Y/Media Study

연결의 과잉, 관계의 결핍

기린그린 2012. 1. 4. 10:45

[사유와 성찰]연결의 과잉, 관계의 결핍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입력 : 2011-12-30 18:23:33수정 : 2011-12-30 21:02:32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대성당>은 소통의 신비를 탁월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주인공의 아내는 자신이 책 읽어주기 자원봉사를 해온 맹인을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 식사 후에 아내는 방으로 들어갔고 거실에 남편과 맹인 둘이 남게 된다. 특별히 나눌 이야기도 없고 해서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시청하는데, 화면에는 유럽의 유명한 대성당들이 하나씩 소개되고 있다. 맹인은 그 장면들에 대해 설명을 부탁한다. 주인공은 몇 마디 말로 묘사해보지만, 스스로 신통치 않다는 느낌이 들어 미안해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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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맹인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낸다. 두꺼운 종이와 펜을 가져다가 함께 그려보자는 것이다. 맹인은 주인공의 손 위에 자기의 손을 얹은 다음, 화면에 보이는 성당을 그리도록 요구한다. 주인공이 그림을 그려나가자 맹인은 매우 흡족해하며 칭찬을 한다. 맹인은 또 한 가지 제안을 덧붙인다. 눈을 감아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 그려보라는 것이다. 대충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맹인은 주인공에게 이제 눈을 뜨고 한 번 보라고 한다. 그리고 물어본다. “어때요? 보고 있나요?” 하지만 주인공은 눈을 뜨지 않는다. 왠지 조금만 더 그렇게 있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가 눈을 감은 채 대답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사람과 사람은 무엇으로 이어지는가. 미디어의 혁신 속에서 소통의 회로는 날로 팽창한다. 트위터의 팔로잉과 팔로어, 페이스북과 카카오톡의 친구들은 계속 늘어난다. 지구 정반대편 사람들과 쉽게 접속하여 친구를 맺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친구들과도 친구를 맺는다. 온라인에서 생성되는 관계는 두뇌의 정보 처리 능력을 넘어서버렸다. 얼마 전에 나온 <과잉 연결 시대(Overconnected)>라는 책은 사이버 네트워크의 과도한 증식이 빚어내는 문제들을 파헤치고 있다. 경제나 시스템에서 나타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생활세계에서 나타나는 부작용도 짚고 있다.


인간들 사이의 연결이 지나치게 늘어나는 것과 상반되는 흐름이 있다. 지난해부터 일본에서 키워드로 떠오른 ‘무연(無緣)사회’가 그것이다. 사회적 관계는 물론 가족 관계마저 끊긴 채 고립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상황을 말한다. 그렇게 홀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을 때 아무도 장례를 치러줄 사람이 없는 죽음을 ‘무연사(無緣死)’라고 하는데, 일본에서 매년 3만2000명이 그렇게 임종한단다. 지난 3월 동일본대지진이 남긴 후유증 가운데 하나도, 수십만명이 한 순간에 혈연, 지연, 사연(社緣)을 모두 잃어버린 것이었다.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다. 한국에도 일인(一人) 가구가 25%에 육박하고 있고, 그 증가의 기울기는 일본보다 더 가파르다. 독거노인의 급증이 가장 큰 이유로 분석된다. 그러나 독거만이 무연사회의 전모는 아니다. 물리적으로 누군가와 함께 살고는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고립되어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또한 휴대전화에 수많은 연락처가 있고 페이스북에 친구들이 넘쳐나지만, 정작 중대한 곤경에 처했을 때 손을 뻗칠 사람이 없는 경우도 많다. 왕따와 괴롭힘으로 자살한 대구의 중학생에게 온라인은 매일 수십 개의 협박 문자가 날아든 통로일 뿐이었고,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조차 그 고통을 거의 알지 못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급격하게 부실해지고 있다. 삶의 현장 곳곳이 사각지대로 방치되고 그 도가니들 안에서 기괴한 폭력이 번식한다. 미디어 이벤트에 집단적으로 열광하고 가끔 정치적 함성이 광장으로 모여들지만, 일상에서 우리는 저마다 골방에 갇혀 지내기 일쑤다. 또한 자신이 남들에게 어떻게 비치는가에 과민하면서, 타인의 곤경에는 지극히 무심하다.


연결의 과잉, 관계의 결핍 시대다. 공감의 유전자는 아직 살아있을까. <대성당>의 주인공이 맹인과 접속한 것 같은 의외의 가능성이 어딘가에 숨어 있을까.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의 무늬를 더듬어본다. 타인에게 이르는 미지의 통로를 응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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