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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 라이프 (Simple Life. 2011)

기린그린 2015. 2. 10. 22:15



늙음과 삶에 대해 조용조용 다독이듯 말을 건네는 영화 <심플 라이프>는 <천녀유혼>, <황비홍> 등을 제작한 홍콩영화계의 거물 로저 리의 실제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는 60년 동안 4대에 걸친 자기 가족에게 헌신한 유모가 병약해지자 친아들처럼 끝까지 그녀를 보살펴 주었는데, 이 사연을 담담하고 심플하게 그려내고 있다.



가족이 모두 미국으로 이민 가고, 홍콩에 혼자 남은 로저는 작은 아파트에 살면서 동분서주하는데, 그를 위해 집에서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고 세탁한 옷을 정리하며 구석구석 먼지를 닦아놓고 기다리는 타오는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길러준 유모이자 가정부다.

어느 순간 시야가 어두워지면서 쓰러진 타오는 몸이 조금씩 마비되자 스스로 은퇴하여 노인요양원에서 살겠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타오가 없는 집에서 세탁기 사용법을 손수 익혀가며 혼자 살기를 시작한 로저는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그녀의 존재감과 보살핌의 흔적을 더욱 절실하게 감지하면서 그녀의 여생을 동반한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는커녕 봉사에 익숙했던 타오가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남에게 맡겨야하는 처지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나, 자기가 하녀로 일했던 집안의 따뜻한 배려를 받으면서 진정한 가족의 일원이었음을 확인해가는 모습은 시종일관 눈물과 미소를 머금게 만든다.




로저는 유모를 돌보면서 온전한 어른으로 성숙해 가는데, 손을 잘 못 쓰는 타오에게 식사하라고 말만 할 줄 알았던 그가 생선살을 발라서 그녀의 밥에 얹어주고, 점점 시들어가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조용히 살펴보며 자기에게 헌신해온 세월을 차근차근 바라보는 로저의 눈길은 백 마디 고맙다는 대사보다 훨씬 더 깊은 여운을 남긴다. 

로저는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이 정하신 순리라고 고백한다.

“내가 아팠을 때 그녀가 나를 돌보고 회복시켜주었고, 이제는 내 차례다. 

하느님은 모든 것이 순리대로 굴러가게 하는 슈퍼컴퓨터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한편 비전문 배우들로 최대한 현실감을 살려낸 이 영화는 고령화된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와 가족해체 시대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가 잘 드러난다. 그래서 카메라가 노인요양원을 비출 때면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이다. 

딸에게 신세를 지면서도 아들만 바라보다 외면당한 할머니나 누가 자식인지도 모른 채 몰래 버려진 할아버지, 

명절에나 찾아오는 행사손님들 말고는 바라볼 사람이 없는 노인들의 퀭한 눈길만 흩어져 있는 풍경은 이제 영화보다 더 익숙해진 우리 현실이다. 그래서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자연스레 나의 부모님과 가까운 친구들을 생각하게 된다.



보석처럼 빛나는 장면이 많지만 어느새 중년 아저씨가 된 유덕화의 연기가 참 좋았는데, 

“영화를 본 뒤엔 꼭 자신을 돌봐주었던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길 바란다.”는 

그의 바람에 나도 많은 이들을 초대하고 싶다.

 

- [야곱의 우물] 2013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