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E D I A/詩

이문재 - 농담 / 오래된 기도

기린그린 2015. 7. 30. 18:33

농담 / 이문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오래된 기도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