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에서 아름다운 어른으로 -리처드 로어
81p. 바울로가 성만찬에 관해 설명한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오래된 본문인데, 우리가 입문하신 분(The Initiated one)의 피를 마심으로써 그분이 온몸으로 걸어가신 여정과 우리가 연대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음을 외치는 것입니다"(1코린 11,26).
이런 제의는 당신의 미트라 제의(Mythic rites)에서 볼 수 있었으며 오늘날에는 아프리카의 성년식 의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바울로는 "기념 음식"(memorial meal)이라는 아이디어를 도입하여 그 죽음의 신비가 갖는 '치유력'을 보여준다.
그것과 싸우지도 말고 부인하지도 말고, 지적인 것으로 만들지도 말고,
대신에 "그것을 씹어먹어라."
그대들의 죽음들이 하나의 죽음이 되어 의미 있게 될 때까지
그 영웅의 피/포도주에 취해 있으라.
이것이 성만찬 신학의 표준이 되었으며 예수님의 의도였다고 믿지만, 성만찬이 너무나 곱게 장식되고 스타일에 맞춰지고 대규모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전형적인 남자들은 결코 성만찬을 통해 축하되는 그 물질적이며 성적이고 심지어 몸을 먹는 죽음의 상징을 이해하지 못했다.
애도 과업(13장)
남자들은 대부분 성장하면서 자신들 속에 공허감을 느낀다.
그것이 아버지에 대한 굶주림이든, 남자로서의 박탈감이든, 개인적인 불안함이든, 모두가 같은 공허감이다.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긍정적인 남성적 에너지, 남성적인 느낌의 방식을 전달받지 못하면, 남자들의 영혼 속에 공백이 생긴다. 그 공백 속으로 악마들이 밀려든다.
무엇보다도 그런 남자들은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사람들을 정확히 파악할 능력을 상실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판단하거나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능력에서 자신감이 별로 없다. 이것은 엄청난 손실이다.
남자들은 자신들이 실제로 무엇을 느끼는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어떻게 공감할지를 알지 못하며,
특히 어떻게 울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애도하는 태도'는 수선하는 태도, 통제하는 태도, 심지어 삶을 이해하는 태도와는 매우 다르다.
남자들에게는 애도를 느끼고 살아내는 법을 가르쳐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남자들은 다른 세 가지 태도로 인생 전체를 살기 십상이다.
애도는 단순히 정의해서 끝나지 않은 상처(unfinished hurt)이다.
애도는 그 힘겨운 단계들을 모두 통과할 필요가 있다. 상처는 결코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그 과정은 내려놓는 과정이며, 우리의 상실을 겪으면서, 그 상실을 깊이 느끼면서, 그 상실이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허락하는 과정이다. 애도처럼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애도는 우리의 마음을 더욱 열게 만들어, 우리가 스스로에게서 나올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 마음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애도는 실제로 우리 영혼의 모습 자체를 변화시킨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상실과 공허를 경험해야만 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는 훈련을 해야만 하며, 인생을 향유할 수 있기 위해 죽음을 겪어야만 한다. 오랜 기간 동안의 애도 과업이 없으면 영혼이 자기 안에 폐쇄된 상태로 남아있게 되며, 자기 내면의 논리 안에서 지껄이며 기본적으로 나머지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상태로 머물게 된다.
그리스도교는 십자가 처형 자체를 모든 참된 사랑의 대가, 변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메시지로 가르치는 대신에 기계적인 속죄이론으로 만들어버렸다. 카를 융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인간이기 위해 마땅히 고통을 직면하거나, 아니면 그것보다 열 배는 더 나쁜 파괴적인 고통을 우리 자신에게 부과한다.
애도 과업은 남자들에게 그 마땅한 고통을 견디는 방법을 가르쳤는데, 그 과정 자체가 더욱 위대한 스승이 되었다.
당신의 상처가 당신에게 가르쳐야만 하는 모든 것을 배우기 전까지는 당신의 상처를 없애지 말라.
당신이 그런 상처 한복판에 있다면, 당신보다 먼저 그것을 겪었던 코치를 찾도록 하라.
요나: 애도와 어둠이 진정한 남자들의 과업에서 핵심이다.
인생 초기에 남자들의 과업의 상당부분은 어떻게 고래 뱃속에서 자신들의 시간을 신뢰하며, 수선하거나 통제하거나 심지어 그 사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어떻게 그 속에 머물러 있으며, 또한 하느님께서 당신을 새로운 해변가에 뱉어놓으실 때까지 어떻게 기다릴 것인지를 가르치는 과업이다.
이것은 '처음 공간'이며, 모든 깊은 변화는 이 처음 공간 안에서 발생한다고 나는 믿는다.
너무 빠르게 희망을 품는 것은 잘못된 것을 희망하는 것이다.
고래 뱃속은 위대한 교육 공간이며, 따라서 예수께서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 (루카 11.,30)라고 말씀하신 것도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사실상 다른 기적을 찾으려는 것은 '문란한' 세대가 하는 짓이다.
남자들은 어떻게 애도해야 하는가를 배워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 남자들은 불가피하게 분노하고 통제하려 하면서도 심지어 그 이유조차도 알지 못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