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 오스카 와일드
41-도리언은 여전히 자기 초상화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지막이 말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슬픈 일인가요! 나는 점점 늙어갈 테고 끔찍하고 무서운 모습으로 변하겠지요. 그런데 이 그림은 언제까지나 젊은 모습 그대로일 거예요. 오늘이 6월의 어느 한 날만큼도 늙지 않겠지요......
다른 방식이 있기만 하다면! 언제까지나 젊음을 간직하는 것은 나고, 늙어가는 것이 이 그림이라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모든 것을 줄 거예요. 이 세상을 통틀어 내가 주지 못할 건 하나도 없어요. 할 수만 있다면 내 영혼도 바칠 거예요."
129- 도리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가며 소리쳤다.(시빌에게)
“그래, 당신은 내 사랑을 죽였어요. 내 상상력을 흔들어놓곤 하던 당신이 이제는 호기심조차 일으키지 않는다고요. 당신은 내게 아무런 힘도 미치지 못해요. 내가 당신을 사랑했던 건 당신이 경이로운 사람이고, 천재성과 지성을 갖추었으며, 위대한 시인의 꿈을 이해하고 예술이라는 그림자에 형태와 실질적인 내용을 불어넣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저 멀리 내던져버렸어. 당신은 천박하고 어리석어요. 세상에! 당신을 사랑하다니 내가 미쳤지! 얼마나 바보같았던가! 당신은 이제 내게 아무 의미도 없어 요. 다시는 당신을 보지 않을 거요. 당신 생각도 하지 않을 거고, 당신 이름조차 입에 올리지 않을 거라고!
예전에 당신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당신은 몰라요. 그러니까 예전에는......그 생각만으로도 견딜 수가 없어. 당신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당신은 내 삶의 낭만을 망쳐놓았어요. 내 사랑이 당신의 예술을 망쳐놓았다고 말하는 걸 보니 당신은 정말 사랑을 모르는군. 당신의 예술이 없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난 당신을 유명하고 화려하고 멋진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어요.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숭배했을 거고, 당신은 내 이름을 널리 알렸겠지. 그런데 지금 당신은 뭐죠? 얼굴만 예쁜 삼류 배우일 뿐이야"
소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온몸을 떨었다. 두 손을 마주 쥐었고 목소리가 목에 걸린 것 같았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죠, 도리언? 지금 연기하는 거죠?
소녀가 중얼거렸다.
"연기라고 했어요? 그런 건 당신한테 남겨주죠. 당신이 아주 잘 하니까."
도리언의 씁쓸한 말에 소녀가 무릎을 펴고 일어나 방 저편에 있는 도리언 쪽으로 걸어갔다. 고통이 가득한 애처로운 표정이었다.
그녀는 도리언의 팔 위에 손을 얹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도리언 이 소녀를 밀어냈다.
"내 몸에 손대지 마요"
133- 문손잡이를 돌리던 그의 눈에 바질 홀워드가 그린 초상화가 들어왔다. 그는 놀라기라도 한 듯 움찔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어딘가 당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코트의 단추를 모두 풀고 나자 도리언은 잠시 망설이더니 마침내 다시 그림 쪽으로 돌아가서는 찬찬히 살폈다. 크림색 실크 커튼 사이로 간신히 희미한 빛이 비쳐드는 가운데 그림 속 얼굴이 조금 달라진 듯 보였다. 표정이 달라진 것 같았다. 입가에 잔인한 느낌이 어려 있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낯설었다.
도리언은 몸을 돌려 창문 쪽으로 가서 커튼을 걷었다. 밝은 새벽 빛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꿈속 같은 그림자가 저편 먼지 낀 구석으로 내몰린 채 그 자리에서 파르르 떨었다. 그러나 방금 전 초상화 속 얼굴에서 보았던 낯선 표정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뚜렷해진 것 같았다. 이 글거리며 떨리는 햇빛 속에서 바라보니 입 주위에 잔인한 주름이 보였다. 마치 그가 끔찍한 짓을 저지른 뒤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선명했다.
그는 뒤로 주춤 물러섰고, 상아 테두리에 큐피드를 새긴 타원형 거울을 탁자에서 집어 들어 쳐다보았다. 헨리 경은 그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는데 이 거울도 그중 하나였다. 입술을 일그러뜨리는 주름 같은 건 없었다. 무슨 의미일까?
도리언은 눈을 비비고는 그림 앞으로 가서 다시 찬찬히 살펴보 았다. 실제 그림을 보았을 때 어떤 변화의 흔적 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전체 표정이 변한 건 분명했다. 그 혼자만의 상상이 아니었다. 소름끼칠 만큼 뚜렷하게 나타나 있었다.
도리언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림이 완성되던 날 바질 홀워드의 화실에서 그 자신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 랐다. 말 한마디 빠뜨리지 않고 생생하게 떠올랐다. 자신은 젊음을 그대로 유지하고 대신 그림이 늙었으면 좋겠다고 정신 나간 소망을 말했다. 자신의 아름다움은 한 군데도 훼손되지 않고 캔버스에 그려진 얼굴만 숱한 걱정과 죄의 무거운 짐을 떠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림 속 모습은 고통과 생각 때문에 주름이 생길지라도 자신은 당시 막 깨달은 소년의 아름다움과 섬세한 꽃을 그대로 간직하 면 좋겠다고 말이다. 분명히 그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렇지만 눈앞에 그림이 있고, 입가에는 잔인한 미소가 흘렀다.
잔인함! 자신이 잔인했단 말인가? 그건 소녀의 잘못이지 그가 잘못한 건 없었다. 그는 소녀가 위대한 예술가가 되기를 꿈꾸었다. 소녀가 위대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의 사랑을 바쳤다. 그런데 소녀가 그를 실망시켰다. 천박하고 하찮은 존재였다. 하지만 자신의 발밑에 누워 어린아이처럼 울던 그녀를 생각하자 끝없는 후회가 몰려왔다. 얼마나 냉담한 태도로 소녀를 바라보았는지 기억이 떠올랐다. 무슨 이유로 그렇게 되었을까? 왜 그러한 영훈이 그에게 생겼을까?
하지만 그 역시 마음이 아팠다. 연극이 공연되는 그 끔찍한 세 시간 동안 도리언은 고통의 수세기를 산 기분이었고, 고문 속에서 영겁의 시간을 보내는 것만 같았다. 그의 삶은 그녀의 삶만큼 가치있다. 도리언이 오래도록 그녀에게 상처를 남겼지만, 소녀도 잠시 나마 그에게 상처를 입혔다. 게다가 여자는 남자에 비해 슬픔을 견 디는 데 훨씬 적합한 성향을 갖고 있다. 그들은 감정을 먹고 사는 존재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자신의 감정밖에 없다. 연인을 만들 때도 함께 멋진 장면을 만들 수 있는 상대를 택하는 것뿐이다. 헨리 경이 그렇게 말했다. 그는 여자라는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왜 시빌 베인 때문에 괴로워해야 하는가? 그녀는 이제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하지만 그림은 어떻게 된거지?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림은 그가 살아가는 삶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림은 그에게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랑하도록 가르쳤다. 이제는 자신의 영혼을 혐오하도록 가르치는 것일까? 그가 그림을 다시 보게 될까?
아니다. 괴로운 마음 때문에 생겨난 환각일 뿐이다. 지난밤 도리언은 끔찍한 시간을 보냈고 그 때문에 환영이 남았던 것이다.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작은 주홍색 반점이 그의 머리 위에 갑자기 떨어졌던 것이다. 그림이 달라진 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니 정말 어리석었다.
하지만 그림은 망가진 아름다운 얼굴로 잔인한 웃음을 머금은 채 도리언을 쳐다 보았다. 그림 속 머리카락이 이른 아침의 햇살을 받아 밝게 빛났다. 그림 속의 파란 눈과 마주쳤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림 속에 담긴 자기 모습을 향해 문득 한없는 연민의 감정이 솟구쳤다. 그림은 달라졌고, 더 많이 바뀔 것이다. 금발은 회색빛 으로 시들어가고, 그림 속에 담긴 붉은 장미와 흰 장미도 시들어버 릴 것이다. 도리언이 죄를 지을 때마다 자국이 남아 쌓이고, 아름다운 모습을 하나씩 파괴할 것이다.
141-그러나 그림이 그를 위해 해준 일이 한 가지 있다고 느꼈다. 그림 때문에 자신이 시빌 베인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었는지, 얼마나 부당한 것을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잘못을 수습하기에 그리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지금도 그녀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다.
그의 비현실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은 더 높은 영향력에 굴복하고, 더욱 고귀한 열정으로 바뀔 것이다. 바질 홀워드가 그려준 초상화는 앞으로 평생 동안 그의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또한 그에게 신성한 존재, 양심과 같은 의미를 가질 것이다. 그에게 초상화는 우리 모두가 신에 대해 갖는 두려움과 같은 의미를 가질 것이다.
후회를 달래주는 아편제도 있고, 도덕의식을 잠재울 수 있는 약도 있다. 그러나 죄악으로 인한 타락을 직접 눈앞에 보여주는 상징이 지금 이 앞에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을 파멸 속에 빠뜨린 흔적을 영원히 있는 그대로 보여줄 것이다.
155- 빅터가 방을 나가자마자 도리언은 얼른 초상화 앞으로 가서 덮개를 벗겼다. 그림은 더 이상 달라진 게 없었다. 도리언이 미처 시빌 베인의 사망 소식을 알기도 전에 그림은 벌써 그 소식을 접한 게 분명했다. 삶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대로 그 일을 알아채는 것이 다. 입술의 아름다운 곡선을 일그러뜨렸던 사악하고 잔인한 표정은 틀림없이 소녀가 독약이든 뭐든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마신 순간 입가에 나타났을 것이다. 아니면 사건의 결말은 아무래도 상관 없었던 걸까? 영혼 속을 스쳐 지나간 그 무엇을 알아본 것일까? 도 리언은 언젠가 그의 눈앞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걸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생각했고,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랐다. 이런 희망을 품는 동안 그의 몸에 전율이 일었다.
181-엿보기 좋아하는 눈을 피해 그림을 숨겨둘 만한 장소로 여기만한 데가 없었다. 열쇠는 그가 갖고 있고 어느 누구도 이 방에 들어올 수 없었다. 화폭에 그려진 얼굴은 저 자줏빛 커다란 보 아래에서 점 점 더 짐승 같은 모습으로, 불결하고 흐리멍덩한 모습으로 변해갈 것이다. 무슨 상관인가? 아무도 그림을 볼 수 없다. 그 자신도 보지 않을 것이다. 뭐 때문에 영혼이 썩어가는 추악한 모습을 지켜봐야 한단 말인가? 그는 젊음을 간직하고 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게다가 그의 본성이 더 훌륭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미래가 수치 심으로 가득할 이유는 없다. 사랑이 그의 삶에 찾아와 그를 맑게 정화시킬 수도 있고, 이미 그의 영혼과 육체 속에서 꿈틀대는 것으 로 보이는 죄악으로부터 그를 보호해줄 수도 있다. 그림 속에도 표현되지 않은 이 신비한 죄악은 그 안에 담긴 비밀스런 신비로 인해 미묘함과 매력을 더해가고 있다. 어쩌면 언젠가는 섬세한 주홍빛 입가에서 잔인한 표정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에게 바질 홀워드의 걸작을 보여줄 수 있겠지.
아니,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시간이 지나고 달이 지나면 화폭 속 얼굴은 점점 늙어갈 것이다. 최악의 추악함은 피해갈 수 있을지 몰라도 나이에서 생기는 추악함이 그 앞에 기다리고 있다. 두 볼은 움푹 패든가 축 늘어질 것이다. 흐리멍덩한 눈 주위에는 주름이 스멀스멀 기어 다니고, 이 때문에 두 눈은 더욱 끔찍한 모습으로 변 해갈 것이다. 머리카락의 윤기는 사라지고, 입술은 축 처지거나 헤벌어진 채 늙은이의 입이 그렇듯 어리석고 천박한 말만 주워 담을 것이다. 어린 시절 그토록 엄격하게 굴었던 할아버지처럼 목에는 주름이 늘어지고, 차가운 손에는 파란 핏줄이 드러나며, 몸은 비비 틀어져 있을 것이다. 그림은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숨겨놓아야 한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188- 도리언의 순수한 얼굴 속에는 그들을 질책하는 뭔가가 들어 있었다. 그가 옆에 가만히 있기만 해도 사람들은 자신이 더럽혀놓은 순수함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처럼 매력적이고 우아한 사람은 이 탐욕스럽고 음란한 시대가 가져다주는 더러운 얼룩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 모두들 궁금하게 여겼다.
도리언은 오랫동안 행방이 묘연한 채 집을 비울 때가 많았고, 이 때문에 그의 친구, 또는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이상한 억측이 난무했다. 이렇게 집을 비웠다가 돌아오면 그는 곧바로 문이 잠긴 위층 방으로 살그머니 기어 올라가, 한 번도 그의 몸에서 떨어져본 적이 없는 열쇠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쪽에 거울을 둔 채 바질 홀워드가 그려준 초상화 앞에 서서 화폭에 담긴 사악하고 늙은 얼굴을 쳐다보다가, 다시 거울에서 그를 비웃고 있는 젊고 아름다운 얼굴을 쳐다 보곤 했다. 두 얼굴이 너무도 극명한 대조를 이룰수록 쾌락의 느낌도 빨리 찾아왔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점점 빠져들었고, 영혼의 부패한 모습에 점점더 많은 흥미를 느꼈다. 무겁고 육감적인 입 주위에 꾸불꾸불 기어 다니는 주름과 이마에 낙인처럼 깊이 팬 주름의 추악한 선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면서 때로는 기괴하고 소름 끼치는 기쁨을 만끽했고, 죄악의 흔적과 세월의 흔적 중 어느 쪽이 더 끔찍한지 궁금해 하기도 했다. 그는 그림 속의 거칠고 비대해진 손 옆에 자신의 하얀 손을 놓고는 빙그레 웃음 지었다. 사지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몸이 기형으로 일그러진 흉내를 내기도 했다.
은은한 향이 풍기는 방 안에 잠 못 이루고 누워 있는 밤이나, 그가 종종변장한 채 가짜 이름을 사용하여 습관처럼 들르곤 하는 평판이 좋지 않은 작은 선술집의 더러운 방에서 밤을 보낼 때면 자신의 영혼을 어떤 파멸로 빠뜨렸는지 생각하면서 연민의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 연민은 순수하게 이기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더 신랄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이런 순간은 잘 찾아오지 않았다. 그와 헨리 경이 바질의 집 화실에서 처음 만나 정원에 함께 앉아 있을 때 헨리 경이 처음으로 그의 마음속에 불러일으컸던 삶에 대한 호기심은 큰 만족을 안겨주면서 점점 더 커져갔다. 많은 것을 알수록 더 많이 알고 싶어졌다. 그 안에 광적인 허기가 들어 차 있어 이를 채울수록 점점더 허기를 느꼈다.
325- 그러나 이 살인은....그를 평생 따라다닐까? 항상 과거의 짐을 질어지고 살아가야 할까? 정말로 자백해야 할까? 결코 그럴 수는 없 없다. 그에게 불리한 증거는 단 하나만 남아 있었다. 바로 초상화 였다. 그는 초상화를 없앨 것이다. 왜 그렇게 오랫동안 초상화를 보관하고 있었을까? 한때 초상화가 변하고 늙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기쁨을 느낀 적이 있었다. 최근에는 한 번도 그런 기쁨을 맛보지 못했다. 이 그림 때문에 밤에도 계속 잠들지 못했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면 혹시 다른 눈이 그림을 볼까 공포에 휩싸였다. 초상화는 그의 열정 위에 우울한 그림자를 덮었다. 초상화에 대한 기억만으로도 즐거운 시간을 수없이 망쳤다. 초상화는 그에게 양심과 같았다. 그렇다, 그의 양심이었다. 그는 초상화를 없앨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자 바질 홀워드를 찔렀던 칼이 보였다. 도리언은 칼에 얼룩이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수차례 닦고 또 닦았다. 칼은 반짝반짝 빛났다. 이 칼이 화가를 죽였듯이 화가의 작품도, 그림 속에 담긴 모든 의미도 죽일 것이다. 이 칼은 과거를 죽일 것이고, 과거가 죽으면 그도 자유로워질 것이다. 칼은 이 괴물 같은 영혼의 삶을 죽일 것이고, 이 추악한 경고가 없어지면 그도 평화로워질 것이다. 그는 손으로 초상화를 부여잡고 칼로 그림을 찔렸다.
비명과 함께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비명은 끔찍할 정도로 고통스러워서 놀란 하인들은 잠에서 깨어나 방에서 나왔다. 아래 광장을 지나가던 두 신사도 발길을 멈추고 커다란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다시 걸어가다가 경찰을 만났고 그와 함께 저택 쪽으로 다시 돌아왔다. 경찰이 몇 차례 초인종을 울렸지만 아무 대답도 없었다. 맨 위층 창문에만 불이 켜져 있을 뿐 집 안은 깜깜했다. 잠시 후 경찰은 인접한 주랑 현관에서 저택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경관님, 저 집에는 누가 살고 있나요?" 두 신사 중 나이 든 쪽이 물었다.
"도리언 그레이 씨네 저택입니다." 경찰의 대답에 두 신사는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 마주 보고 코웃음을 쳤다. 그중 한 사람은 헨리 애슈턴 경의 숙부였다.
하인들 숙소에서는 옷을 대충 걸친 하인들이 모여 낮은 소리로 서로 속삭였다. 늙은 리프 부인이 손을 뒤틀면서 울었고, 프랜시스는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다.
15분쯤 지났을 때 프랜시스가 마부와 하인 한 명을 데리고 살그머니 위층으로 올라갔다.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 대답도 없었다. 다시 큰 소리로 불렀다. 모든 게 조용하기만 했다. 문을 억지로 열어 보려 했지만 결국은 헛된 시도로 끝나자 이들은 지붕을 통해 발코니로 내려왔다. 오래되어 낡은 빗장 덕분에 창문은 쉽게 열렸다.
하인들이 방으로 들어갔을 때 벽에는 눈부신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본 주인의 모습, 더없이 아름답고 젊고 경이로운 모습이 담겨 있었다. 바닥에는 한 남자가 만찬 예복을 입고 손에는 칼을 든 채 죽어 있었다. 남자는 여위고, 온통 쭈글쭈글 한 주름이 가득했으며, 생김새도 혐오스러웠다. 하인들은 그의 손 가락에 끼어 있는 반지를 꼼꼼히 살펴보고 나서야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