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여행 1 - 김훈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 067
숲은 가까워야 한다. 싶은 가까운 숲을 으뜸으로 진다. 노르웨이의 숲이나 로키 산맥의 숲보다도 사람들의 마을 한복판에 들어선 정발 산경기도 고양시 일산동• 내가 사는 풍네의 숲이 더 값지다. 숲은 가깝고 만만하지만, 숲이 사람을 위로할 수 있게 되는 까닭은 그곳이 여전히 문화의 영역이 아니라 자연이기 때문이다.
숲의 시간은 헐겁고 느슨하다. 숲의 시간은 퇴적의 앙금을 남기지 않는다. 숲의 시간은 흐르고 쌓여서 역사를 이루지 않는다. 숲의 시간은 흘러가고 또 흘러오는 소멸과 신생의 순환으로서 새롭고 싱싱하다. 숲의 시간은 언제나 갓 태어난 풋것의 시간이다.
사진작가 강운구가 새로 펴낸 책 [사진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는 오래되어서 새로운 숲의 빛을 보여준다. 일연(1206~1259)의 옛글에 강운구의 요즘 사진을 합친 책이다. 지나간 역사의 무덤 위에, 살아 있는 현재의 빛이 내리쬐고 있다. 계림의 숲과 포석정의 숲이 다르지 않고 반월성의 숲과 남산의 숲이 다르지 않다. 그리고 김춘추 무덤가의 숲과 계백 무덤가의 숲이 다르지 않다. 옛 무덤들은 오늘의 빛으로 푸르게 빛난다.
096. 거듭 말하거니와 나는 모국어의 여러 글자들 중에서 '숲'을 편애한다.' 수풀도 좋지만 '숲만은 못하다. '숲'의 어감은 깊고 서늘한데, 이 서늘함 속에는 향기와 습기가 번져 있다. '숲'의 어감 속에는 말라서 바스락거리는 건조감이 들어 있고, 젖어서 편안한 습기도 느껴진다.
'숲'은 마른 글자인가 젖은 글자인가. 이 글자 속에서는 나무를 흔드는 바람 소리가 들리고, 골짜기를 휩쓸며 치솟는 눈보라 소리가 들리고 떡갈나무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린다.
깊은 숲 속에서는 숨 또한 깊어져서 들숨은 몸속의 먼 오지에까지 스며드는데, 숲이 숨 속으로 빨려들어올 때 나는 숲과 숨은 같은 어원 을 가진 글자라는 행복한 몽상을 방치해둔다. 내 몽상 속에서 숲은 대 지 위로 펼쳐놓은 숨의 바다이고 숨이 닿는 자리마다 숲은 일어선다.
'숲'의 피율받침은 외향성이고, '숨'의 미음받침은 내향성이다. 그래서 숲은 우거져서 펼쳐지고 숨은 몸 안으로 스미는데 숨이 숲을 빨아 당길 때 나무의 숨과 사람의 숨은 포개진다. 몸속이 숲이고 숲이 숨인 것이어서 숲과 숨은 동일한 발생 근거를 갖는다는 나의 몽상은 어학적으로는 어떨는지 몰라도 인체생리학적으로는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몸이 입증하는 것들을 논리의 이름으로 부정할 수 있을 만큼 명석하지 못하다.
밥벌이에 지친 날에는 숲 속의 나무들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먹이를 몸 밖에서 구하지 않고, 몸 밖의 먹이를 입으로 씹어서 몸 안으로 밀어넣지 않고, 제 몸속에서 햇빛과 물과 공기를 비벼서 스스로를 부양하는 저 푸르고 우뚝한 것들은 얼마나 복 받은 존재들인가. 중생의 맨 밑바닥에서 나무는 중생의 탈을 벗고 있다. 밥벌이에 지친 저녁에 이경준 교수가 지은 [수목생리학]이나 파브르의 [식물기]를 꺼내놓고 광합성, 수목의 생장, 햇빛과 엽록소의 관계 같은 페이지들을 읽는 일은 쓸쓸하다. 이 쓸쓸함은 식물의 자족회로 앞에서 느끼는 동물의 슬픔이다. 무기물을 유기물로 전환시키는 작용이 나무의 생명현상이다.
그 전환의 생화학적 과정을 모두 분석하고 분석의 파편들을 다시 종합해도 어째서 생명이 아닌 것들로부터 생명인 것이 빚어지는지를 나는 알 수가 없다. 어째서 이 전환은 초록 계통의 세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숲은 왜 초록색인지, 숲을 초록으로 인지하는 나의 지각과 언어는 정당한 것인지를 나는 결국 알지 못한다. 나의 무지에도 불구하고 광합성을 기술하는 [수목생리학]의 페이지들은 아름답고, 바람에 흔들리는 광릉의 여름 숲은 자유가 깃들 만큼 서늘하고 깊어서, 숲 속에서 나는 세계의 궁극으로 다가가는 식물학자가 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나이테와 자전거 107-108
나무는 개체 안에 세대를 축적한다. 지나간 세대는 동심원의 안쪽으로 모이고 젊은 세대가 몸의 바깥쪽을 둘러싼다. 나무껍질 바로 밑이 가장 활발히 살아 있는 세대이다. 이 젊은 세대가 뿌리의 물을 우듬지까지 끌어올려 모든 잎들을 빛나게 하고 나무의 몸통을 키운다.
그리고 이 젊은 세대는 점차 기능이 둔화되고 마침내 정지되어 통합의 안쪽으로 숨어들고, 나무껍질 밑에는 다시 새로운 세대가 태어난다. 젊음은 바깥쪽을 둘러싸고 늙음은 안쪽으로 고인다. 식물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나무 밑동에서 살아 있는 부분은 지름의 10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바깥쪽이고, 그 안쪽은 대부분 생명의 기능이 소절한 상태라고 한다. 동심원의 중심부는 물기가 닿지 않아 무기물로 변해 있고, 이 중심부는 나무가 사는 일에 간여하지 않는다. 이 중심부는 무위와 적막의 나라인데 이 무위의 중심이 나무의 전 존재를 하늘을 향한 수직으로 버티어준다. 존재 전체가 수직으로 서지 못하면 나무는 죽는다. 무위는 존재의 뼈대이다. 하나의 핵심부를 중심으로 여러 겹의 동심원을 이루는 세대들의 역할 분담과 전승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 나이테를 들여다보는 일의 기쁨이다.
나무의 늙음은 낡음이나 쇠퇴가 아니라 완성이다. 이 완성은 적막한 무위이며 단단한 응축인 것인데 하늘을 향해 곧게 서는 나무의 향일성은 이 중심의 무위에 기대고 있다. 무위의 중심이 곧게 서지 못하면 나무는 쓰러지고 거죽의 젊음은 살 자리를 잃는다. 중심부는 존재의 고요한 기둥이고 바깥쪽은 생성의 바쁜 현장인데, 새로운 세대의 표층이 태어나면 생성과 존재가 사명을 교대하면서 나이테는 하나에 늘어간다. 동심원 속에서 늙음과 젊음이, 전위와 후방이 순탄한 정서를 이루어 나무는 곧게 서서 잎을 띄우고, 꽃을 피우고, 또 잎을 떨군다. 나이테의 동심원 속에서는 후방이 전위보다 훨씬 더 두껍고 단단한 것이어서 잎 피는 나무의 그 찬란한 전위는 모두 이 후방에 기대어 있다. 이 중심부 쪽 후방이 나무의 가장 단단하고 안정된 부분이다.
기둥을 세울 때 목공은 나무의 겉부분은 다 깎아버리고, 고급 가구는 대부분이 후방만을 잘라내서 목재로 쓰고 있다.
나무들 사이를 자전거로 달릴 때, 바퀴는 굴러도 바퀴의 중심축의 한 극점은 항상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 극점이 움직인다면 자전거 바퀴의 회전운동은 불가능할 것이다. 적막한 중심은 나이테 동심원 속에 있고 자전거 바퀴 속에도 있다. 그 중심이 자전거를 나아가게 해준다. 숲 속으로 자전거를 저어갈 때 나무와 자전거는 다르지 않다. 나무는 늘 인간의 마을에서 자란다. 광릉 숲은 서울에서 가까워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