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옳다 - 정혜신
p49. 이럴 때 A에게 산소 공급이란 "집에 또 못 들어가고 있구나. 무슨 일이 있었나 보네" 같은 말이다. 이 말은 이 시간에 네가 집 밖을 배 회하고 있다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는 이해다. 네가 이상한 애라서 달밤에 체조하고 있는 게 아닐 거라는 무조건적 믿음과 지지다. 그 말은 A를 절대적으로 안심하게 해준다.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확인이 있어야 사람은 그 다음 발길을 어디로 옮길지 생각할 수 있다. 자기에 대해 안심해야 그 다음에 대해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 네가 그럴 때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말은 '너는 항상 옳다'는 말의 본뜻이다. 그것은 확실한 '내 편 인증이다. 이것이 심리적 생명줄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에게 꼭 필요한 산소 공급이다.
p88-89. 우리나라에서 대부분의 직장생활은 한 인간이 입체적인 모습과 다양한 역할로 사는 시간이 아니다. 회사가 필요로 하는 도구로 살 아온 시간이며, 사회적 성공이란 자기 억압의 결과일 수 있다. 그런 삶의 끝에서 만나는 은퇴란 몸에 밴 자기 억압이 한꺼번에 풀리는 일대 사건이다. 과장하자면 평생 감옥에 있다 출소하면서 눈부신 햇빛에 눈을 찡그리는 출소자 같은 상태다. 24시간 정해져 있는 삶을 살다가 사방 어디로든 발을 떼어도 되고 언제 먹든 언제 잠자리에 들든 자유로운 상태다. 비로소 내 삶으로 돌아오는 순간이다.
하지만 장기수로 살다 막 출소한 사람에게는 세상이 아득하고 두렵다. 그때 찾아오는 무력감과 우울, 피해 의식 같은 감정이 은퇴자 의 감정이다. 우울과 무력감은 그 마음 상태를 정확하게 반영해 주 는 거울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그때의 무력감과 우울은 지금은 털썩 주저앉아 내 삶을 먹먹하게 돌아봐야 하는 때라고 알려주는 신호다.
감방을 나온 사람의 눈동자에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홍채라는 조리개 기능으로 일단은 차단해야 하듯, 너무 많은 시간과 자유와 자극으로부터 당분간은 주춤거린 채 있어야 한다고 알려주는 신호다. 새롭게 활력을 찾겠다고 헬스클럽과 학원을 전전할 게 아니라 조금은 더 주저앉아 있을 때라고, 마음은 우울과 무력감을 통해 그걸 알려주고 있다.
그렇게 내 감정은 나를 리얼월드로 데려간다. 나를 순정하게 만나게해주는 곳이 리얼월드다. 내게도 막막할 때가 있구나. 아무런 계획도 떠오르지 않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가 있구나. 나도 그렇구나 하는 것을 느끼면서 삶에 대한 현실 감각이 조금씩 돌아온다.
처음으로 가족들이 실감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내가 누구인지, 그들에게 내가 어떤 존재였는지, 그간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들이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처음으로 감각한다. 절름발이 같은 도구적 삶에서 벗어나 드디어 나와 만난다. 삶의 축복이다.
이 과정의 심리적 발판이 무력감과 우울이라는 감정이다. 그 감정을 도움판으로 해서 깨달음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의 무력감은 빛나기만 했던 자신의 삶이 사실은 반쪽짜리에 불과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생각과 판단이 자신을 그렇게까지 감지하지 못했을 때조차 감정은 자신의 나머지 반쪽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드러낸다.
그것이 감정이 하는 일이다. 그의 현역 시절은 탈일상적, 탈인간적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은퇴 후에 처음으로 맞는 온전한 내 삶은 그렇게 무력감, 우울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p105. 내 느낌이나 감정은 내 존재로 들어가는 문이다. 느낌을 통해 사람은 진솔한 자기 존재를 만날 수 있다. 느낌을 통해 사람은 자기 존재에 더 밀착할 수 있다. 느낌에 민감해지면 액세서리나 스펙 차원의 '나'가 아니라 존재 차원의 '나'를 더 수월하게 만날 수 있다. '나'가 또렷해져야 그 다음부터 비로소 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p127. 잘 모르면 우선 찬찬히 물어야 한다.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인 정해야 시작되는 과정이 공감이다. 제대로 알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 지 조심스럽게 물어야 공감할 수 있다. 그래서 공감은 가장 입체적이 고 총체적인 파악인 동시에 상대에 대한 이해이고 앎이다.
p274. 누군가의 속마음을 듣다 자기를 만나면 버선발로 뛰어나가서 반겨 야 한다. 내 지난 세월을 누군가에게 다시 이야기하는 과정을 통해서 나도 동시에 공감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아들 얘기를 한다지만 실은 계속 자기 얘기를 하게 된다. 아들 걱정을 한다지만 사실은 지난 시절 자신의 상처와 불안, 회한을 무한 반복하게 된다.
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만날 수 없다.
자기 모습만을 무한 투사하며 불안해하게 된다. 이미 아들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 된다. 내 상처 속에 매몰돼서다.
너를 공감하는 일과 내가 공감받고 싶은 일이 있을 땐 항상 내가 공감받는 일이 먼저다. 내가 공감받아야 비로소 왜곡되지 않은 시선으로 너를 제대로 공감할 수 있다.
타인을 공감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자신을 공감하는 일이다.
자신이 공감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타인에게 공감 하는 일은 감정 노동이든 아니든 공감하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를 공감하는 일은 시늉할 수 없다. 남들은 몰라도 자기 를 속일 방법은 없다.
누구든 타인을 공감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문제가 자극돼 떠오르 고 뒤섞이면 혼란에 빠진다. 그때의 혼란은 자기 치유와 내면의 성숙을 위한 통과의례같은 반가운 혼란이다. 어떤 종류이든 혼란은 힘들다. 에너지 소모가 극심해서다. 그럼에도 나에 대한 혼란은 반가운 손님이다. 꽃 본 듯 반겨야 한다. 그 혼란에 주목하고 집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