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E D I A/책방

한 사람의 마을

기린그린 2024. 2. 8. 15:14



P35. 처음으로 내가 혼자임을 느꼈다. 그것들이 무리 지어, 연결되어, 더 미를 이루어 나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나의 무리는 수십 리 떨어진 황사량 02※ 마을에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마을 사람들은 나를 도울 수 없었다. 나의 벗과 친지는 나를 도울 수 없었다.
나의 외로움과 두려움은 마을에서 딸려온 것이었다.
군중 속에 있든 황야에 있든, 사람은 끝내는 외로움과 두려움을 홀로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그 사람 혼자만의 것이다.
벌레 한 마리, 풀 한 포기가 거대한 무리 속에서 자신의 즐거움과 괴로움을 쓸쓸히 마주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른 풀, 다른 벌레는 알지 못한다.
나무 한 그루가 말라 죽어간다. 그것은 잎도 꽃도 없는 고사목의 시기에, 삶보다 더 기나긴 시기에 앞당겨 들어섰다. 다른 나무들은 아직 가지도 잎도 무성한 채 살아 있다. 햇살은 푸르른 잎새에도 내 려앉고 말라 죽은 나무에도 내려앉는다. 햇빛 속에서 한 그루 고사 목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땅속 깊이 묻힌 그의 뿌리는 어디론가 뻗어가고 있다. 죽음 이후의 일은 우리가 알 수 없다.
한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그를 어딘가에 놓아둔다 땅속에.
우리는 무덤 곁에서 살아간다. 살다 살다보면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든다. 이 길은 누가 남긴 것인가. 이 일은 누가 해냈던가. 이 말은 누 구 입에서 나왔던가. 그녀를 사랑했던 자는 누구였던가.

P40. 꽃 한 송이에 미소 짓다
뒤돌아보니 내 뒤에 있는 풀이 모조리 꽃망울을 터뜨렸다. 누가 우스개라도 해서 너른 들판의 풀을 모두 웃게 만든 것 같았다.
나는 비탈에 누워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런 생각이랄까 한 사람의 머릿속에 든 희한한 생각이 우스워서, 풀이 산들바람 속에서 허리가 끊어져라 웃고 있다.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풀도 있고, 입술을 반쯤 가리고 웃음을 참으려 안간힘쓰는 풀도 있다. 내 곁에 꽃 두 송 이가 있다. 한 송이는 나를 보면서 얇은 분홍빛 꽃잎을 펼치는데 웃 음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다. 다른 한 송이는 고개를 돌려 얼 굴을 가렸지만 웃음을 감추진 못한다. 나도 참지 못하고 웃기 시작한 다. 빙그레 미소 짓다가 하하하 웃음을 터뜨린다.
황야에서 혼자 소리 내어 웃어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P63. 내 삶에는 나귀 한 마리, 개 한 마리, 얼룩무늬 토종닭 떼, 매애매 우는 수염 난 염소 몇 마리, 그리고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스러운 딸 아이가 들어와 있다. 널찍한 마당과 집 한 채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더 많은 생명이 이 집을 찾는다. 나무에 내려앉은 새, 처마 밑에 둥지 를 튼 제비, 겨울밤에 살금살금 찾아오는 산토끼•···•· 내 생명은 이 수많은 짐승으로 토막토막 나뉜다. 각각의 동물 몸에서 내 모습이 조 금씩 보인다. 나는 자꾸만 가벼워져 존재하지 않게 되고, 눈에 보이 는 것은 이 짐승들뿐이다. 그들이 뿔뿔이 흩어질 때 내 몸의 어떤 부 분도 그들을 따라간다. 그들이 돌아오지 않거나 늦게 돌아오는 바람 에 잠을 이루지 못한 적도 있다. 내 세월은 가축들의 우리가 되었다.

P310.  네가 나에게 준 모든 가르침을 나는 천천히 깨우치게 되리라. 이생 에서 나는 개집에서 죽은 그 검둥개를 사부님이라고, 알을 숨기기 좋 아하는 그 암탉을 스승님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그들의 가르침 가운데 지금까지 고작 10분의 1밖에 못 썼다.
한 번 더 태어날 기회가 있다면, 통나무 곁에서 20년을 지켜보게 된다면 나는 세상 모든 이치를 깨우치리라. 이곳에 있는 모든 사물에 는 모든 것이 내포되어 있다.
온순하고 성실한 늙은 소는 참고 견디는 법을 가르친다. 고집쟁이 소의 몸에 겹겹이 생긴 채찍 자국은 불순종한 자의 수난과 고통을 일깨워준다. 나무에 앉은 새는 종알거리는 수다쟁이 여인을 길러냈는 지도 모른다. 담장 아래 누워 있는 돼지는 게으름뱅이 사내를 가르쳤 을 것이다. 들판 가득한 잡초는 해마다 누군가가 심경의 영락을 겪게 한다. 담 모퉁이 흙을 뚫고 나온 작은 풀은 홀로 누군가 한 사람을 가르친다.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은 누군가의 마음을 이리저리 데려 간다.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바람은 누군가의 성격을 길러낸다. 멀리 서 물결치는 모래 능선은 누군가의 포부를 키워낸다. 누군가는 벌레 우는 소리 속에 깨어나고 개 짖는 소리 속에 잠든다. 나뭇잎 하나가 누군가의 생에 내려앉는다. 먼지 한 알이 누군가의 일생을 떠다닌다.
누군가는 황사량의 이후 백 년의 모든 수확을 거둔다. 우리가 걸 어갈 앞날에는 텅 빈 세월만 남겨둔 채.
자기 집 풀 더미와 거름 더미에 올라서서 집으로 돌아오는 소와 양을 지켜보던 그 아이는 끝내는 모든 인생과 세상을 보게 된다. 처 음부터 높은 곳에 올라가서 세상을 보던 사람들이 마지막에 가서 보는 것은 사람들과 가축들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