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와의 데이트 - 강남순
”사실이란 없다. 해석만 있을 뿐이다.“ - 니체
P36.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순간, '애도'는 시작된다. 내가 관계하는 타자와 나는 언젠가 '이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이별이 자의적 선택 에 의해서든 또는 육체적 죽음에 의해서든 모든 만남은 '언제나 이미 헤어짐을 품고 있다. 데리다와 데이트를 시작하는 순간, 우리의 애도 역시 시작된다. 불가능성의 세계에 대한 열정 그리고 이 삶에 대한 고도의 인정(afimation)을 중요한 가치라고 가르쳐주는 데리다와 데이트를 시작하는 순간, 우리의 애도는 이미 시작되었다.
“나•우리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
P384.
데리다에게 종교란 단일한 집합체가 아님을 매번 상기해야 한다.
데리다가 신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그것은 언제나 인용부호 속의 '신앙'이다. 따라서 데리다에게서 '신앙'이란 특정한 종교 전통이나 철학 전통에의 소속성, 또는 배타적 연관성을 지니는 개념이 아니다. 종교가 제도화될 때, 그 종교는 진리/신에 확실성'과 '정형성'을 그 토대로 삼게 된다. 다양한 예전과 교리, 그리고 제도적 조직화를 통해서 '고착될 수 없는 것'을 고착하게 되고, '확실할 수 없는 것을 정형화함으로써 제도적 종교는 유지되고 재생산된다. 인간의 유한한 인식능력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을 '파악 가능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종교는 그 존재 의미를 상실하고 왜곡하게 되는 것이다. 유한자인 인간이 무한자인 신을 어떻게 '파악'하고 이해 할 수 있겠는가. 그 어떤 위대한 인간도 인간•너머의 존재' 또는 소위 '진리'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절대화' 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절대화의 덫에 빠지자마자, 종교의 근원적 왜곡이 시작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유명한 기도 "나는 신에게 내 속의 신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한다(I pray to God to rid me of God)" 는 심오한 종교적 함의를 담고 있다. 신 또는 진리에 대한 확실성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결정성이 아닌 '비결정성'을, 그리고 명명성 (nameability)이 아닌 '비명명성(unnameability)'을 받아들일 때 오히려 신/진리는 무한한 공간에서 인간의 구체적 현실 세계와 맞닿는 불가능한 가능성을 확장하게 된다.
엑카르트의 기도는 종교와 신의 정형화에 경고하면서, 탈정형화된 '해체적 종교, 해체적 신'의 의미를 드러낸다. 나의 유한한 인식과 경험체계 속에서 무한한 존재인 '신'을 절대화하고 고정하려는 인식론적 욕구를 넘어, 내 속에서 고정된 '확실성의 신'을 제거함으로써 '불확실성의 신', 비결정성의 신'에 대한 갈망을 지켜내고 그 신을 무한의 가능성 속에 다시 위치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유한성 속에 갇힌 '신'을 해체하여 '삭제 아래 (God under erasure)'으로 대체하는 것-이러한 해체적 행위는 '파괴'가 아닌 '무한한 인정/긍정'이 된다. 내가 인지하는 신은 언제나 '도래하는 신'에 열려 있어야 하며, 지금의 '신'을 탈고정화하면서 전적으로 낯선 타자'에 열려 있어야 함을 제시한다. 언제나 '더(more)'가 있음을 인지하고 알고자 하는 열정을 지닌다면, 지금 내가 생각하는 신, 사람, 사물 등에 대한 인식을 고정시키거나 절대화하는 것은 결국 인식적 폭력'임을 이해하게 된다.
P389. “종교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것, 즉 열정의 남자와 여자들, 이득을 취하는 것이 아닌 그 어떤 것에 대한 열정을 지닌 실제의 사람들, 그 어떤 것을 믿는 이들, 그 어떤 것을 미치듯 치열하게 희망하는 이들, 이해를 홀연히 넘어서는 그 어떤 것을 사랑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신앙, 희망, 그리고 사랑,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최고의 것은 사랑이다"(고린도전서 13:13). 종교적인 사람의 반대는 사랑 없는 사람(loveless person)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신을 알지 못한다.”(요한1서 4:8).
나는 이러한 데리다의 '종교 없는 종교'가 추상적이거나, 기존의 제도화된 종교들을 파괴하려는 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 종교들이 고정되어 죽어있는 '제도'가 아니라, 생명력 있는 살아있는 종교를 만드는 데 중요한 통찰을 준다고 본다. 예수의 "최후 심판"이라는 매우 종말론적 비유(마태복음 25: 31-46)가 있다. 그 비유에서 예수가 제시하는 '최후 심판' 기준은 우리의 예상을 뒤집는다.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낯선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을 돌보고, 환대하고, 책임적 연대를 나누었는가 하는 것이 바로 '심판'의 기준이다. 그 여섯 가지 항목 중 소위 '종교적인 것'은 전혀 없다. 이 기준이란 데리다의 종교에서 강조하는 바, '책임성으로서의 종교'이며, 무조건적' 책임, 환대, 용서, 연대와 같은 '불가능성에의 열정'임을 확인할 수 있다.
P411. 데리다는 누구인가. 이 질문의 답은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이야기 가 나올 것이다. 데리다는 '나에게' 누구인가라고 질문을 바꾸어서 해야 하는 이유다. 나에게 데리다는 무엇보다도 '함께 살아감'이라는 과제를 그 누구보다도 심오하게 그리고 복합적으로 보여주는 사상가이며, '새로운 선생'이다.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면서 '매 죽음마다 세계의 종국'이라고 하는 데리다는, 복잡하고 난해한 그의 글들 너머에서 이 '함께 살아감'의 의미를 섬세하고 예리하게 '미소'와 함께 보여준다. 그의 코즈모폴리터니즘, 용서, 선물, 환대, 우정, 애도, 정의 등은 각기 다양한 방식으로 '함께 살아감'의 과제 위에서 새로운 사유로 이어진다. 데리다가 나에게 남긴 '유산'이다. 고정된 방법이나 이론이 아니라, 일어나는 사건으로서의 해체는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하며, 따라서 해체란 '사랑의 작업'이라고 한 데리다는 말과 글,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생명의 소중함을 '불가능성에의 열정'으로 품어 내고 가꾼다.
데리다가 우리 각자에게 남긴 '유산'은 다를 것이다. 각기 다른 유산일지라도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데리다와 데이트를 시작한 이들이, '새로운 선생'으로서 데리다가 가르쳐주는 '전적 타자'를 향한 '관대함, 환대의 시선' 그리고 타자에게 (to), 타자와 함께(with) 살아감의 기쁨을 품은 '웃음'을 배우며 데이트를 계속해 나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