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카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현대판으로 재구성한다면 어떤 이야기가 될까? 내 상상으로는 이런 시나리오가 가능할 것 같다. 남보다 하루 빨리 성공하고 싶었던 아들은 ‘스타’가 되기를 꿈꾸며 아직도 성성하신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챙겨서 대도시로 떠난다. 현대 사회를 움직이는 최대의 자본이자 권력인 스타로서의 인기를 누린다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그래서 아들은 일단 꽃미남 같은 얼굴로 성형수술을 하고, 배에 왕(王)자가 새겨지도록 근육을 다듬은 다음, 춤과 노래, 연기실력까지 두루 겸비해 놓는다. 자신을 잘 포장해서 오디션과 촬영장을 부지런히 오가던 어느 날, 길거리 캐스팅으로 대박의 기회를 잡은 그는 드디어 스타덤에 오른다. 하지만 금새 취향이 달라지는 대중의 변덕스런 요구와 샛별들에게 밀려나 올드스타(old star)로서 빛을 잃어가는 것은 시간문제... 그는 이제 어디에서 자기 자신을 찾을 것인가?

영화 ‘돈 컴 노킹(Don't come knocking)’은 이렇게 빛바랜 올드스타의 때늦은 방랑기를 들려주고 있다. ‘영원한 길 위의 동반자’로 불리며, 인생을 길 위에 펼쳐놓고 시적인 카메라 워킹으로 사색하기를 즐기는 독일의 영화감독 빔 벤더스는 30년간 집을 떠났다가 타락한 인생을 짊어지고 어머니에게 돌아오는 한 영화배우의 귀향길에 우리를 초대한다. 한때 할리우드를 주름잡았던 하워드 스펜스는 이제 한물간 서부영화만큼이나 초라해진 배우다. ‘서부의 유령’이라는 영화를 촬영하는 도중, 진짜 유령처럼 말을 타고 사라져버린 하워드는 삭막하고 황량한 땅에서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가난한 노인의 낡은 셔츠와 바꿔 입고, 신발과 말까지도 다 주고 떠난다. 그리고 신용카드와 핸드폰까지 모두 부숴버리고 어머니가 있는 고향을 찾아간다. 왜 갑자기 그런 일을 저지르는지 설명해주지 않지만, 그의 공허한 눈동자와 초점 없는 시선에서 나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문득 내가 사는 현실이 갑갑하게 느껴질 때 일상의 탈출을 꿈꾸는 것처럼, 세상에 내 편이 아무도 없고 고립되었다고 느껴질 때 무작정 어머니가 보고 싶은, 그런 심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하워드는 어머니 곁에서도 여전히 안식을 취하지 못하고, 술과 도박에 몸을 맡긴다. 사람들이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을 참지 못하고 싸움을 벌인 그는 경찰서에 연행되었다가 풀려난다. 그리고 자기가 쓰던 방에서 어머니가 30년간 스크랩해놓은 앨범을 보면서 술과 여자, 마약과 폭력으로 점철된 자기 삶을 대면하게 된다. 그 모든 것이 쾌락을 얻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즐겁지 않았노라고 뒤늦게야 어머니에게 털어놓는 하워드...

5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도 모르고 땅만 보는 아이처럼, 자기 삶에 얼룩진 수치와 부도덕함을 애써 외면하려는 아들의 모습을 그저 담담하게 지켜보던 어머니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말해준다. 어떤 여인이 그의 아들을 낳아 기르고 있으니 그 아들을 책임지라는 것이다. 아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하워드는 이제 그 낯선 아들을 찾아서 길을 떠난다. 30년 만에 돌아온 아들이 그 세월만큼 버려두었던 과거 속으로 떠나는 두 번째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서부영화의 전성기를 따라 발전했다가 지금은 영화와 함께 쇠락한 도시 뷰트, 하워드는 그곳에서 옛 애인과 아들 얼을 대면한다. 그러나 “Don't come knocking”(문을 두드리지 마시오)이라는 팻말을 걸고, 마음의 문마저 잠그고 살았던 하워드와 아버지 없는 빈자리를 애써 감추고 살아온 아들의 만남은 예기치 못한 혼란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더 이상 상처받기 싫어서 서로 자존심만 내세우고 싸우는 연인들처럼, 겉으로 보이는 부자의 첫 상봉은 꼭 원수를 만난 것처럼 사납다. 그러자 하워드는 아들과 그 도시로부터 다시 도망치려하고, 얼은 자기방의 모든 물건을 창밖으로 내던지면서 화를 내지만,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서로를 갈망하고 기다려왔던 진심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디선가 나타난 하워드의 딸이자 얼의 이복남매인 스카이는 그들 부자를 따라다니며 먼저 손을 내밀고,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법을 가르쳐준다. 정말 하늘처럼 모든 것을 덮어주고 받아주는 스카이는 아버지와 얼이 두려움 때문에 굳게 닫은 마음의 빗장을 열고, 그들이 가슴 깊이 숨겨놓고 알아보지 못하는 그리움과 사랑을 꺼내놓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STOP’이라는 표지판이 눈에 띄는 막다른 길에서 얼이 집어던진 소파에 앉아 밤새도록, 그리고 하루 종일 아들을 기다리는 하워드, 숱한 세월을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로부터 이리저리 도망 다녔던 그는 여기서 잠깐 멈추고 현실을 직시한다. 돈으로 거래할 수 있는 관계만 맺어왔던 그는 이제 가족과 아이들에게 가한 상처를 인정하고, 또 자기보다 더 자기존재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아들이 주는 상처를 받아들임으로써 진정한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이들은 이미 30년 전에 가족으로 맺어져서 하나의 세상 안에 살고 있었지만, 이제야 서로를 알아보게 된 것이다.

나를 필요로 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불행해 하는 것은 내가 내 안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하워드처럼 자기 스스로는 도저히 문을 열 수 없는 고독과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혼자가 아닌데도 자기 스스로 고립된 인생을 살았던 하워드가 가족을 재발견한 것은 스카이가 먼저 문을 두드려준 덕분이었고, 그것은 오래전 그들과 나누었던 사랑과 생명을 되찾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그것을 ‘부활’이라고 말하고 싶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그분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서 문을 꼭꼭 잠그고 있었는데, 그분이 먼저 들어오셔서 평화의 인사를 나누시고 손을 내미셨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들을 믿지 못하고, 슬픔에 빠져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도 주님은 먼저 다가가셔서 말을 건네시고 그들 마음을 열어주셨다. 그분이 우리 마음 안에 먼저 들어와 주셨기에 우리 마음은 뜨겁게 감동하고 그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셨기에, 사람들과 나누는 따뜻한 사랑 안에서 그분을 기억하고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눈이 어둠 속에 있을 때나 빛 가운데 있을 때나,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거나 못 느끼거나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인생의 어느 순간이라도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음에 가슴이 따뜻해진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주님이 함께 계시다는 증거이다. 그것은 하워드가 어머니께 가는 버스 안에서 본 사람이 부르던 노래와도 같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네. 길에도 계시고 부엌에도 계시네...’ 아주 짧은 순간에 지나갔지만, 그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신 영화라 그런지, 하워드가 과거와 함께 잃어버렸던 가족을 다시 만나면서 자기 자신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을 따라가는 카메라의 시선은 참 인내롭고 따뜻하다.

무의식적으로 자기 존재의 뿌리를 찾아 나섰던 하워드의 여행을 쫓아오다 보니, 인간은 누구나 그 근원을 찾아 가는 여정에 놓여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우리는 숱한 만남과 이별을 통해 하나의 근원적인 만남에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그 일차적인 근원은 가족이요, 더 깊이 들어가면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가 닿는다.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기에 우리는 하느님을 찾고 또 사랑을 찾아서 끝없는 길을 걷고 또 걷는다. 우리의 출발점은 각기 다르지만 하나의 목적지를 지향하고 있기에 언제 어디에서 만나든 함께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물간 배우이자 철없는 아저씨의 좌충우돌했던 이 여행이 나에게도 참 아름다운 여정으로 기억될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얼과 스카이가 함께 차를 타고 달리는 도로에 꽂혀있는 표지판을 눈여겨 볼만 하다. 빔 벤더스는 자주 이런 상징을 이용하는데, 거기엔 ‘Divide 1, Wisdom 52’ 라고 적혀 있다. 이것은 단절(Divide)과 소외의 길은 가깝고, 지혜(Wisdom)까지 이르는 길은 멀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우리는 그곳에 언젠가는 함께 도달할 것이요, 나와 동행하는 계신 그분을 알아볼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Wisdom’ 아니겠는가!
- [성서와 함께] 2006. 4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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