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T U D Y/Media Study

라푼젤처럼 진짜세상 향해 ‘금지된 외출’을

기린그린 2011. 5. 1. 21:20

 

 

라푼젤처럼 진짜세상 향해 ‘금지된 외출’을

한겨레
» 정여울 문학평론가
[정여울의 청소년인문학]

문명이 발전할수록 왜 육아 스트레스는 더 심각해지는 것일까. 아이들은 더 많은 위험 속에 노출되고, 세상은 점점 더 험악해지는 것만 같다. 더욱 발전된 문명은 더욱 다채로운 위험의 가능성을 낳는 것일까.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푼젤>의 마녀 고델은 그런 의미에서 단지 동화 속 마녀가 아니라 아이를 지키기 위해 점점 더 과잉보호로 치닫는 슈퍼맘의 이미지를 닮았다. “세상은 아주 위험한 곳이란다. 무섭고 못된 인간이 많아. 넌 안전한 이곳에 있어야 해.” 라푼젤은 24시간 부모에게 보호관찰당하는 아이들의 은유처럼 느껴진다. 아름다운 공주를 납치하여 거대한 탑에 가둬놓고 21m에 이르는 공주의 기다란 금발을 엘리베이터 삼아 은밀하게 탑을 왕래하는 마녀 고델. 고델은 모성의 전지전능함을 강조하며 세상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소녀 라푼젤의 호기심을 뿌리부터 싹둑 잘라버리려 한다.

고델은 각종 도둑과 강도, 독초, 들짐승과 뱀, 전염병으로 가득한 세상에 대한 공포로 18살 소녀를 지배하려 한다. 위험을 경험해볼 기회조차 주지 않는 마녀 고델의 철통보안에도 불구하고 라푼젤은 멋진 남자와 함께 탈주에 성공한다. 아무리 감시망을 철저히 해도 기어이 부모의 레이더망을 뚫고 탈출하고야 마는 것은 동서양 모든 아이들의 통과의례가 아닐까.

탑에 갇혀 언제나 창문을 통해 세상을 엿보는 데 익숙해진 라푼젤의 모습 또한 미디어라는 거대한 성벽에 갇힌 현대인의 모습을 닮았다. 요즘 아이들은 그림동화 <라푼젤>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푼젤>을 먼저 볼 것이다. 세상 또한 마찬가지다. 미디어의 가상경험이 실제경험을 압도하는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엄청난 사건을 접했을 때 오히려 이렇게 반응한다. “와, 이건 완전 영화 같다!” “그런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믿나?”

미디어는 이제 세계를 재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경험하기 전에 세계를 미리 학습하는 시뮬레이션의 도구다. 텔레비전, 인터넷, 스크린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실제 세상보다 훨씬 안전하다. 우리는 우리 몸을 전혀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고도 세상의 온갖 경험을 습득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미디어를 통해 습득한 간접경험이 실재 세계의 직접경험을 대체할 수 있을까.

그림동화 <라푼젤>은 디즈니의 <라푼젤>보다 실재 세계의 참혹함을 더욱 강렬하게 묘사한다. 라푼젤은 왕자의 아기를 임신한 상태에서 마녀에게 쫓겨나고, 왕자는 연인을 잃은 슬픔 때문에 절망하여 탑에서 뛰어내린 후 실명하고 만다. 그림동화의 섬뜩한 진실은 탑 안쪽에서만 바라본 세상의 ‘상상된 아름다움’이 아니라 탑 바깥으로 나가야만 경험할 수 있는 ‘현실의 끔찍함’을 절절히 그려낸다. 그러나 온몸의 세포를 찌르고 할퀴는 실재 세계의 고통, 그 고통을 뛰어넘는 기쁨 또한 오직 미디어가 아닌 실재 세계에만 존재한다. 라푼젤은 홀로 왕자의 쌍둥이를 낳아 힘겹게 싱글맘으로 살아가던 중, 자신을 잃고 온 세상을 헤매고 있는 장님 남편을 다시 만나게 된다. 마녀는 안전하지만 아무것도 경험할 수 없는 거대한 탑으로부터 라푼젤 커플을 추방하는 대신, 그들에게 ‘진짜 세계’를 선물한 것이다. 라푼젤의 뜨거운 눈물이 실명한 왕자의 두 눈 위에 떨어지자 왕자는 비로소 눈을 뜨게 된다.

탑을 떠나서야 진짜 삶을 되찾은 라푼젤처럼, 미디어라는 성벽에 갇혀 실재세계를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현대인에게도 ‘간접경험의 한계’를 뛰어넘는 ‘진짜 세상’의 아픔이 필요한 것 아닐까. <라푼젤>은 미디어의 성벽에 스스로를 가둔 현대인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여행책자의 사진만 보지 말고, 진짜 여행을 떠나라고. 사랑 영화만 보지 말고, 진짜 사랑을 하라고. 더 이상 게임중독에 빠져 온라인 세계 속의 제왕에 만족하지 말고, 진짜 세상과 맞짱 뜨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