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E D I A/책방

타인의 얼굴 - 엠마누엘 레비나스

기린그린 2020. 5. 12. 01:39





얼굴의 현현

타인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레비나스의 철학적 사유은 타인의 존재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밝히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는 타자와의 관계를 “얼굴의 현현”을 통해 접근한다. 

얼굴의 현현은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물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 즉 참된 인간성의 차원을 열어 준다. 

얼굴은 일종의 계시다. 얼굴은 나의 입장과 위치와 상관없이 스스로 자기를 표현하는 가능성이다. 

얼굴의 현현은 일종의 윤리적 호소이다. 얼굴은 나에게 명령하는 힘으로 다가온다. 

이 힘은 강자의 힘이 아니라 상처받을 가능성, 무저항에서 오는 힘이다. 

예컨대 궁핍 속에 있는 이웃은 우리에게 윤리적 명령에 직면하게 한다. 

그의 궁핍과 곤궁은 하나의 명령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나는 얼굴의 호소를 거절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때 나는 불의를 저지르는 셈이 된다.

얼굴이 자기 스스로 내보이는 방식을 레비나스는 ‘계시’라 부른다. 

계시라는 종교적 용어를 쓴 까닭은 얼굴의 현현은 내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타나는 절대적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타자의 얼굴 현현은 하나의 모순에 직면하게 만든다. 

얼굴은 타자의 무력함과 주인됨을 동시에 계시하기 때문이다.

가장 낮은 것은 가장 높은 것과 결합한다.

 

“타자는 타자로서의 높음과 비천함의 차원에 처해 있다. 

영광스러운 비천함. 타자는 가난한 자와 나그네, 과부와 고아의 얼굴을 하고 있고 

동시에 나의 자유를 정당화하라고 요구하는 주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나는 내 자신을 벗어나 그를 모실 때 비로소 그때 그와 동등할 수 있다."

 

내가 타자를 내 집으로 받아들이는 것,

즉 그를 내 손님으로 환대하는 가운데 구체적 윤리성이 시작되며 

내 자신은 내면성, 내재성의 세계를 벗어나 진정한 초월적 주체, 도덕적 주체가 될 수 있다.

 

배고프고 헐벗은 가운데, 사회적 불의 가운데 나에게 호소해오는 타인은 

지금까지 제한 없이 자유를 행사하던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온다. 

타인은 그의 벌거벗은 얼굴을 통해 나를 판단하고 정죄한다. 

타인은 나를 고발하고 호소한다. 

나는 타인에게 주격으로서가 아니라 목적격으로, 다시 말해 죄 있는 자로 고발된다. 

나는 타인에게 갇힌 자로, 타인에게 ‘볼모’로 붙잡힌다. 

타인의 얼굴의 호소를 통해 나는 나의 자기중심적인 삶에 대해 대답하도록 요구받는다. 

이 요구로 나는 상처받고 고난 받는다. 

도망을 시도해도 불가능하다. 타인은 나를 끝까지 따라온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타인이 나를 정죄하고 사로잡음을

‘끝까지per-' ’따라와secui' 괴롭힌다는 뜻으로 ‘핍박persecution' 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렇게 타인에 대해서 심지어 희생자가 되기까지 비천해지고 

마치 예수가 말했듯이 머리 하나 눕힐 곳 없는 존재가 된다. 

이처럼 타인의 얼굴로부터 오는 윤리적 호소는 나에게 행복을 주기보다 오히려 고통을 준다. 

나만이 누리던 자유가 부당함을 일깨우고 타인을 수용하고, 

내 것을 내어놓고 타인을 환대하도록 요구한다. 

응답을 요구하는 타인의 부름에 내가 ’응답할 때,

‘나를 ’응답할 수 있는‘ 존재로 세울 때 

나는 비로소 ’응답하는 자‘로서 ’책임적 존재‘ 또는 윤리적 주체로 탄생한다.

 

타인의 일깨움에 대한 책임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나를 ‘윤리적 불면’으로, 

나를 타인에 의해 사로잡힌 존재로 몰아넣는 일에 머물지 않는다. 

타인의 일깨움은 나를 높이 세워주고 나를 고귀한 존재로 만든다. 

타인은 나에게 문자 그대로 “혼을 불어넣어주며 in-spiration" 나에게 ”영을 집어넣어“준다. 

타인은 나의 호흡이며, 나의 혼이며 나의 영이다. 

그러므로 ‘타인에 대한 책임,’ 곧 타인이 나에게 일깨워준 책임은 나를 움직이고, 

살아 있게 만들며, 나를 고귀한 영적 존재로 만든다. 

타자가 내 안에 ‘혼을 불어넣음’은 타자가 내 몸으로 육화incarnation되어

타인의 고통을 위해 나를 내어줄 수 있도록 노출시킨다. 

내 안에 들어온 타자는 내 안에서 타자를 위해 짐을 짊어질 수 있도록 나를 키워낸다. 

 (p.182-186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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