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은 꿀을 모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도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벌도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며 이 자연 법칙의 유일한 주제는 생존이다. 꿀과 행복, 그 자체가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 둘 다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간단히 말해,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감을 느끼도록 설계된 것이 인간이다.
묘한 점은 이것이다. 개는 서핑하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서핑을 하고 있다. 개의 유일한 관심사는 새우깡이었고, 이것을 먹기 위한 행동이 어느새 서핑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그러면 개는 왜 그토록 새우깡을 먹으려고 했을까? 새우깡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먹을 때 개의 뇌에서 유발되는 쾌감 혹은 즐거움 때문이다. 개는 이 쾌감을 다시 느끼기 위해 새우깡을 계속 원하게 된 것이고, 그 과정의 누적이 서핑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사실 나는 개도 서핑도 관심 없다. 하지만 이 예시는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본질적 속성을 아주 쉽게 설명한다. 한마디로 행복의 본질은 개에게 서핑을 하도록 만드는 새우깡과 비슷하다. 차이점은 인간의 궁극적 목표가 서핑이 아니라 생존이라는 점이다. 서핑과 생존. 차원이 다른 두 목표지만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이 필요하다.
자연은 기막히게 설계를 했다. 내 생각에, 개에게 사용된 새우깡 같은 유인책이 인간의 경우 행복감(쾌감)이다. 개가 새우깡을 얻기 위해 서핑을 배우듯, 인간도 쾌감을 얻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뇌 속의 행복 탐지기에서 신호가 울리는 순간, 인간은 쾌감을 느낀다.
모든 동물의 뇌가 가진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쾌 혹은 불쾌의 경험을 즉각적으로 구분하고 만들어내는 것이다. 인간이 느끼는 쾌감은 뇌의 여러 부위가 만들어내는 합작품이지만, 역시 시상하부가 큰 역할을 한다. 그리고 쥐와 마찬가지로 쾌감과 연합된 경험을 기억 속에 확실히 남겨놓는다. 첫사랑, 그때 그곳, 그 맛을 절대 잊지 못하게 만든다.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강렬한 고통과 기쁨은 모두 사람에게서 비롯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이별, 짝사랑... 인간을 시름시름 앓게 하는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하지만 인간이 느끼는 가장 강력한 기쁨 또한 사람을 통해 온다. 사랑이 싹틀 때, 오랜 이별 뒤의 만남, 칭찬과 인정... 그래서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인간이 치르는 가장 성대한 의식들은 사람과의 만남(결혼, 탄생) 혹은 이별(장례)을 위함인 것이다.
왜 이토록 인간은 서로를 필요로 할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막대한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바로 생존. 세상에 포식자들이 있는 한, 모든 동물의 생존 확률은 다른 개체와 함께 있을 때 높아진다.
지난 30년간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행복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중 가장 중요하고도 확고한 결론은 무엇일까? 내 생각에는 두 가지다.
첫째, 행복은 객관적인 삶의 조건들에 의해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 둘째, 행복의 개인차를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그가 물려받은 유전적 특성,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외향성이라는 성격 특질이다.
스칸디나비아 행복의 원동력은 넘치는 자유, 타인에 대한 신뢰, 그리고 다양한 재능과 관심에 대한 존중이다. 그들 사회는 돈이나 지위 같은 삶의 외형보다 자신에게 중요한 일상의 즐거움과 의미에 더 관심을 두고 사는 곳이다.
불행의 감소와 행복의 증가는 서로 다른 별개의 현상이라는 것이다.
행복을 따뜻한 샤워에 비유한다면, 우리의 정서 시스템은 찬물과 더운물을 조절하는 꼭지가 따로 달려 있는 샤워기와 같다. 불행의 요인들을 줄이는 것은 마치 찬물 꼭지를 잠그는 것과 비슷하다. 이것으로 샤워물이 덜 차가워질 수는 있지만 더 따뜻해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인생에서 추구하는 많은 삶의 조건들은 이 샤워기의 찬물 꼭지와 비슷하다. 물을 덜 차게, 즉 삶을 덜 불편하게 만드는 효과는 크지만, 물을 뜨겁게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다.
우리 생각이 가진 또 하나의 허점이 있다. 인생의 어떤 변화가 생기는 순간과 그 변화가 자리 잡은 뒤의 구체적인 경험은 차이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둘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는다.
영어로 표현한다면, 'becoming(~이 되는 것)'과 'being(~으로 사는 것)'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재벌집 며느리가 되는 것과 그 집안 며느리가 되어 하루하루를 사는 것은 아주 다른 얘기다. 하지만 우리는 화려한 변신의 순간에만 주목하지, 이 삶을 구성하는 그 뒤의 많은 시간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공하면 당연히 행복해지리라는 기대를 하지만, 실상 큰 행복에 변화가 없다는 사실은 살면서 깨닫게 된다.
많은 사람이 돈이나 출세 같은 인생의 변화를 통해 생기는 행복의 총량을 과대평가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행복의 '지속성' 측면을 빼놓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간단한 복습을 하자. 우리 뇌는 일종의 탐지기라는 비유를 했고, 이 탐지기의 목적은 우리가 생존에 필요한 자원들을 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새우깡이 개를 서핑하게 만들 듯이 우리도 어떤 보상이 있어야 사냥과 짝짓기 같은 행위를 한다. 쾌감이 바로 우리 뇌가 고안한 보상이다. 개가 새우깡 맛에 빠져 어느새 서핑까지 하듯 우리도 쾌감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존에 필요한 자원들을 손에 쥐는 것이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은, 이런 생존 행위는 반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오늘 아무리 영양가 높은 음식을 먹어도, 살기 위해서는 내일 또 사냥을 해야 한다.
사냥에 대한 의욕이 다시 생기기 위한 필요조건이 있다. 오늘 고기를 씹으며 느낀 쾌감이 곧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쾌감 수준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이런 '초기화 reset' 과정이 있어야만 그 쾌감을 유발시킨 그 무엇을 다시 찾는다.
쾌락은 생존을 위해 설계된 경험이고, 그것이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본래 값으로 되돌아가는 초기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이 적응이라는 현상이 일어나는 생물학적 이유다. 그리고 수십 년의 연구에서 좋은 조건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장기적으로 훨씬 행복하다는 증거를 찾지 못한 원인이기도 하다. 아무리 대단한 조건을 갖게 되어도, 여기에 딸려왔던 행복감은 생존을 위해 곧 초기화돼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복은 '한 방'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쾌락은 곧 소멸되기 때문에, 한 번의 커다란 기쁨보다 작은 기쁨을 여러 번 느끼는 것이 절대적이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Happiness is the frequency, not the intensity, of ositive affect.'
결국 행복은 아이스크림과 비슷하다는 과학적 결론이 나온다. 아이스크림은 입을 잠시 즐겁게 하지만 반드시 녹는다. 내 손 안의 아이스크림만은 녹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 행복해지기 위해 인생의 거창한 것들을 좇는 이유다.
하지만 행복 공화국에는 냉장고라는 것이 없다. 남는 옵션은 하나다. 모든 것은 녹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자주 여러 번 아이스크림을 맛보는 것이다.
'사람쟁이' 성격
유전과 행복을 각각 하나의 대륙이라고 한다면, 이 둘을 연결하는 다리는 '외향성'이라는 성격 특질이다. 유전적 영향에 의해 외향적 수치는 어느 정도 정해지며, 그 외향성의 정도가 개인의 행복수치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
외향성이 높은 사람의 특성은 무엇일까? 대표적으로는 사람을 찾고, 그들과 절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외향성이 높을수록 자극을 추구하고, 자기 확신이 높고, 처벌을 피하는 것보다는 보상이나 즐거움을 늘리는 데 초점을 둔다. 최근 연구들에 의하면, 외향적인 사람들이 타인을 찾는 본질적인 이유가 자극 추구라는 흥미로운 설명도 있다. 사실 사람만큼 '자극적인 자극'도 없다. 구체적인 이유야 무엇이든 외향성은 한마디로 '사람쟁이' 성격이다.
그렇다면 내향적인 사람들은 왜 외향적인 사람들만큼 타인과 어울리지 않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싫어서가 아니라 불편해서다. 사람이라는 자극은 양날의 검과 같다. 사람은 즐거움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때론 가장 큰 스트레서가 될 수도 있다. 내향적인 사람들은 이런 사회적 스트레스를 더 예민하게, 더 많은 사람으로부터 경험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서 한발 뒷걸음질 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사람이 싫은 것과는 다른 얘기다.
행복감을 예측하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특성은 개인주의다. 소득 수준이 높은 북미나 유럽 국가들의 행복감이 높은 이유는, 사실은 상당 부분 돈 때문이 아니라 유복한 국가에서 피어나는 개인주의적 문화 덕분이다. 그래서 개인주의적 성향을 통계적으로 제거하면, 국가 소득과 행복의 관계가 거의 소멸된다. 즉, 개인주의는 국가의 경제 수준과 행복을 이어주는 일종의 '접착제' 역할을 한다.
역으로 이 접착제(개인주의)가 부족한 사회는 경제적 발전을 이룩해도 거기에 상응하는 행복감이 뒤따라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한국과 일본이 그 예다.
획일적인 사고는 행복에 큰 타격을 준다. 마치 행복에도 정답이 있고, 이는 몇 개의 잣대로 압축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좋은 대학 간판, 대기업 명함, 높은 연봉, 이런 조건들을 갖추지 못한 인생은 왠지 '행복 시험'에서 낙제한 것 같은, 그래서 불행한 삶이라는 좌절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 문화의 이런 획일적인 사고는 개인의 자유감을 저하시키고, 더 나아가 행복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렇지만 문화적 분위기가 심리적 자유감을 무조건 박탈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결정적인 것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시선에 얼마나 신경을 쓰며 사느냐다.
이렇듯 과도한 타인 의식은 집단주의 문화의 행복감을 낮춘다. 행복의 중요 요건 중 하나는 내 삶의 주인이 타인이 아니라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아의 많은 부분이 다른 사람으로 채워진 한국인들은 자칫 잘못하면 타인에게 삶의 주도권을 내어주게 된다. 세상을 나의 눈으로 보기보다 남의 눈을 통해 보려고 한다. 이때부터 행복의 걸림돌을 여기저기서 만나게 된다.
우선 타인의 평가를 의식하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는 대단한 스트레스다. 인간의 뇌는 철저히 사회적인 뇌라고 했다. 생존과 직결된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파악하는 것은 뇌의 최우선적 임무 중 하나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과 주의가 자동적으로 집중되고, 집중하는 만큼 피로와 불안도 쉽게 온다.
결론을 맺을 때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행복에 대한 두 가지 생각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어서였다. 우선, 행복은 거창한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쾌락에 뿌리를 둔, 기쁨과 즐거움 같은 긍정적 정서들이다. 이런 경험은 본질적으로 뇌에서 발생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철학이 아닌 생물학적 논리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행복의 핵심인 고통과 쾌락은 본질적으로 생각이 아니다.
둘째, 행복에 대한 이해는 곧 인간이라는 동물이 왜 쾌감을 느끼는지를 이해하는 것과 직결된다. 인간만큼 쾌감을 다양한 곳에서 느끼는 동물이 없다. 쇼팽과 셰익스피어도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쾌감은 먹을 때와 섹스할 때, 더 넓게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온다. 진화의 여정에서 쾌감이라는 경험이 탄생한 이유 자체가 두 자원(생존과 번식)을 확보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행복의 핵심을 한 장의 사진에 담는다면 어떤 모습일까? 이 책의 내용과 지금까지의 다양한 연구 결과들을 총체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것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장면이다. 문명에 묻혀 살지만, 우리의 원시적인 뇌가 여전히 가장 흥분하며 즐거워하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다. 음식, 그리고 사람.
행복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모든 껍데기를 벗겨내면 행복은 결국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요약된다. 행복과 불행은 이 장면이 가득한 인생 대 그렇지 않은 인생의 차이다. 한마디 덧붙인다면 "The rest are details." 나머지 것들은 주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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