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E D I A/책방

독일인의 사랑

기린그린 2023. 4. 23. 20:19

그러면 무엇이 이 어린 시절의 천진난만한 평화를 깨뜨린 것일까?

어떻게 해서 이처럼 티없이 맑고 깨끗한 상태가 종말을 고하게 된단 말인가?

그 무엇이 우리를 아무런 마음의 부담이 없는 행복으로부터 몰아내고 갑작스럽게 적막한 어둠과 고독 속으로 몰아넣는 것일까?

그렇게 만든 것은 죄악이라고 심각한 얼굴로 말하지는 말자. 어린 아이가 어떻게 죄를 지을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우리는 그것을 잘 알지 못하며, 다만 신의 뜻에 따를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럼 꽃봉오리가 꽃이 되고, 그 꽃이 열매가 되고, 그 열매가 다시 한 줌 흙이 되는 것이 죄악이란 말인가!

그리고 유충이 번데기가 되고, 번데기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흙으로 변하는 것도 죄악이란 말인가!

또 어린 아이가 어른이 되고, 어른이 노인이 되고, 노인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도 죄악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흙, 흙이란 무엇일까? 차라리 우리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오로지 세상의 순리에 따를 뿐이라고 말하라.

 

"그때 어린이의 눈에 비치는 동경의 세계는 한없이 맑고 깨끗한, 사랑의 세계인 것이다.

그것은 온 세계를 감싸는 사랑이 며, 맑게 빛나는 눈동자가 그를 향해 빛날 때 타오르는 사랑이며,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때에 기쁨이 넘쳐흐르는 사랑이다.

그것은 옛날부터 수치를 잴 수 없는 사랑이며, 어떠한 측량기구로도 깊이를 잴 수 없는 샘물의 원천지이며,

아무리 퍼내어도 바닥이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물인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아는 사람이면 사랑에는 척도라는 것이 없다는 것,

다만 사랑을 하려면 온몸과 마음을 다해 고스란히 바쳐 져야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진정한 사랑은 우리가 인생의 절반도 채 살기 전에 다 없어지고 그토록 작은 부분만이 남게 되다니!

어린 아이들이 세상에 남(다른 사람)이라는 존재가 있음을 알게 된다면 이미 그 아이는 어린 아이라 할 수 없다. 22p

 

하지만 그녀는 나의 마음속에 강렬한 형상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즉 그녀는 이 현실에서는 존재하지도 않고 또한 존재할 수도 없는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바로 나의 천사였으며, 나 혼자 이야기를 하는 대신에 나와 함께 이야기를 하는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곤 했었다.

어찌하여 그녀가 나에게 그와 같은 존재가 되었는지 나 자신도 설명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사람의 눈은 종종 하늘에 떠 있는 구름도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볼 때가 있는 것처럼, 나의 상상력이 내 어린 시절의 하늘에 그런 추억을 마술처럼 불러일으켜 현실의 아련한 윤곽으로부터 하나의 완전한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던 것이 라고 생각된다.

나의 모든 생각은 모르는 사이에 그녀와의 대화의 형식으로 되어 갔으며, 나의 내부에 존재하는 선한 것, 내가 추구하는 목표, 내가 신앙을 갖는 모든 대상, 그 모든 것들이 그녀에게 속해 있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그녀에게 주었는데, 또한 그 것들은 모두 나의 천사인 그녀를 통해서 내가 받은 것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플라톤의 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에서나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속박된 시의 형식으로 표현된

   자유로운 영혼뿐.

 

소네트

 

아름다움은 나를 하늘로 향하게 한다.

(아름다움 외에는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없다.)

그리하여 나 산 채로 영혼의 전당에 들어선다.

인간의 몸으로는 그와 같은 영광을 누리기 드물리라!

작품 속에 창조주가 있듯이

나 그를 통해 영감을 얻는다

그곳에서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아름다움에 취한 마음 움직여 주는

온갖 사념뿐.

아름다움에 눈멀어 헤어나지 못함은

신의 꽃밭을 가는 길을 비춰 주는

그 거룩한 빛이 그 눈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그 눈빛이 내 가슴에 불타오를 때

나의 고귀한 불꽃 속에는 

천국을 지배하는 기쁨이 부드럽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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