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E D I A/책방

청춘의 문장들

기린그린 2025. 1. 19. 21:30

청춘의 문장들 - 김연수

그날도 잠에서 덜 깬 멍청한 표정을 하고 화장실로 갔다. 집게로 창가 재떨이와 소변기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줍다가 '이 주의 금언을 언뜻 봤다. 계속 청소하다가 뭔가 이상해서 다시 봤다.
『논어」의 한 구절이었다.
“즐거워하되 음란하지 말며 슬프되 상심에 이러지 말자.”

오줌이 묻은 양철 집게를 들고 서서 나는 웃었다. 한참 동안 웃었다. 웃음을 그치고 담배꽁초를 줍는데 다시 배시시 웃음이 터져났다. 이러지 말자가 아니라 '이르지 말자라고 해야 옳았기 때문이었다. 자꾸만 내 머릿속으로는 공자님이 이른 아침 왜 가야만 하는지도 모르고 가야만 하는 부대 화장실에서 집게로 담배 꽁초를 줍는 내 소매를 붙잡고 '김 일병, 이러지 말자. 우리 아무리 슬프되 상심에 이러지 말자라고 애원하는 광경이 떠올랐다.
알겠습니다, 공자님. 잘 알겠습니다.
보통의 남자들이 들으면 나를 향해 더이상 던질 비웃음이 없어 안타까워하겠지만, 방위병 생활을 하면서 나는 참 많은 걸 배웠다.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당기면 현역병이든 방위병이든, 심지어는 예비군이든 총알을 쏠 수 있다는 무서운 사실을 그때 처음 배웠다.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도 덤으로 배웠다.
하지만 그 무엇도 잘못 쓴 그 금언만큼 큰 깨달음을 주지는 않았다. 삶의 길은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도 하고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라도 상심에 이러면 안된다.
슬프되 상심에 이러지 말자. 잘 살아보자.

P195. 살아오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영어 가정법 문장을 어떻 게 만드는지도 배웠고 3차 방정식을 그래프로 옮기는 법도 배웠다. 하지만 내가 배운 가장 소중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일 수 있는지 알게 된 일이다. 내 안에는 많은 빛이 숨어 있다는 것, 어디까지나 지금의 나란 그 빛의 극히 일부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 을 깨닫게 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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