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E D I A/갤러리

존재하지 않는 세계 - 장 보드리야르 사진전

기린그린 2010. 5. 16. 18:14


고맙게도 많은 비가 내릴 거라는 일기예보를 뒤엎고 
여름날 치고는 걷기 좋은 선선한 바람이 불던 오늘,
문득 그 바람을 타고 세상 구경을 떠났다.  
혼자 낯선 세상을 여행하러 나간 것이 무척 오랜만인 듯 하다. 
내가 최고로 멀리 갈 수 있는 방법은 다른 매체를 빌려 타는 것이다. 
처음에는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In This World'라는 로드무비를 통해 
아프간에서 런던에 이르는 길고 험난한 여정을 같이하고,
그 다음엔 경복궁 옆에 있는 대림미술관에서 장 보드리야르의 사진을 통해 
세계 곳곳을 스치고 지나갔던 유혹적인 이미지들을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참... 신선한 만남이었고, 나 자신이 이 세상과 더 깊이 소통하는 것 같아서 뿌듯했다. 

'시뮬라시옹 Simulation' 이라는 개념으로 유명한 포스트 모던 학자 장 보드리야르.
그에게 있어 사진은 순수한 이미지 그 자체이다. 
그가 이미지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 짤막한 문장으로 정리되어 있었지만, 
사실 그의 말처럼 말이나 해설이 필요 없는 사진들이었다. 
액자 속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빛과 형상이 이룬 완벽한 순간을 정지시켜 놓은 것이었다. 

"사진은 찍는 사람이 선택하여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찍히는 대상이 우리를 유혹하여 우리로 하여금 찍게 하는 것이다."

과연 그의 사진들을 보며 '어떻게 이런 유혹을 알아차렸을까...??' 계속 감탄했다.  
그리고 나도 그런 빛의 유혹에 더 민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랬다. 
세계의 여러 도시에서 만난 이미지들이지만, 
그것들은 여기에 사는 우리 일상을 감싸고 있는 평범한 것들이다. 
그저 우연히 발견한 것 같은데도, 
우연이 아니라 세상 창조때부터 그런 모습을 있었던 것처럼 
순간의 이미지에 담긴 영원성이 나를 한없이 끌어들였다.  
보드리야르는 사진을 찍는 순간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으며,
렌즈를 통해 보여지는 이미지 자체의 형태만을 바라보라고 한다. 
자칫 그 말만 듣는다면 그 이미지가 냉정할 것만 같은데,
실제 그의 포착한 이미지 안에는 세계도 있고, 사람 냄새도 난다. 
그게 참 좋았다. 
그래서 내가 그의 자화상에 더 감동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앞에서 말한대로라면 그를 유혹한 것은 그 자신이지만  
어둠과 빛의 일부가 된 그 자신은 또 하나의 존재가 된 듯 하였다.   

원래 계획했던 여행이 아닌데, 
그의 사진과 글을 통해 나는 또 하나의 세계에 눈을 뜬 것 같다. 
그가 선사한 이미지들을 영영 내 옆에 두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어서 
화보책을 뒤적거렸는데보았는데, 
다행히도...
책으로 인쇄한 이미지는 그 아우라가 엄청나게 상실되어 있어서
빈 손으로 오는 것이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내 지갑에는 천 오백 오십원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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