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네트워크서비스(SNS·Social Network Service), 이 단어는 참으로 기묘하다. ‘사교망 서비스’라고 해야 할까? 폭넓게 사람들을 사귀고 대화할 수 있는 만남의 중재 기술과 매체를 이야ㅈ기하는 것 같은데, 이에 덧붙은 용어 자체가 장엄하다. 이제 우리는 한번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카카오톡 같은 SNS에 눈길을 던지고 그들의 유혹 앞에서 주저하게 된다. 그 세계에 동참할 것인가, 아니면 외부에 존재할 것인가? 하지만 각자의 선택과 상관없이 미디어 산업계가 출현시켜 대부분의 사람이 알게 모르게 동의해버린 SNS는 이내 곧 사라져버릴 기술이 아니라 지배적인 기술로 오랫동안 생활 깊숙이 자리잡는다는 점에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자기고백 상호작용의 팽창
그런데 SNS는 ‘맘 놓고 대범하게 선뜻’ 선택하거나 진입할 수 있는 세계는 아니다. 최소한 나를 공개하고 노출하게 되면서 뒤따르는 위험이나 부담감을 이겨낼 자신이 있어야 한다. 또 나의 사교망을 무진장 넓혀가는 삶의 논리에 동의해야 한다. 나를 특정한 목적에 따라 나쁘게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음에도 그 위험을 조금은 둔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강심장도 있어야 한다. 방송통신위원회의 보도자료에 따르면, 트위터를 통해 한 개인의 구체적 인맥, 얼굴 등 외모, 위치 정보, 관심 분야 등 취미, 스케줄, 가족관계나 가족 구성원 정보, 직장이나 동호회 등 소속, 구매 기록 등 소비 성향, 생년월일, 근무처, 병력 등 의료 정보, 경력, 출생지, 정치 성향, 주소, 종교, 전자우편, 병역 정보, 키나 몸무게, 소득 등 놀라울 정도로 많은 정보가 공개되고 게시된다. 하지만 사교망 서비스 참여자는 이것의 심각성에 다소 둔감해 보인다. 사교망 서비스 이용자는 자신을 수많은 사람에게 끊임없이 고백하려는 자세와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같은 조건을 갖춘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고백의 상호작용에 빠져든다. 나를 드러내고 설명해주고 보여주고 고백하는 상호작용에 관대한 사람들은 SNS가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주체다.
|  | | ▲ <에곤 실레의 초상>, 1915-작자 미상 | 언제 일어나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누구를 좋아하고 싫어하며, 기분이 어떻고…. 사교망 서비스를 통해 지속적으로 행해지는 자기고백은 다수의 지인뿐만 아니라 그 지인의 지인들로 연결되며 이뤄진다. 이 사교망에 등록되고 연결된 사람들은 한 사람의 자기고백에 응답하거나 또 다른 자기고백으로 응대한다. 고백에 대한 응대의 부족과 부재를 참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자신과 관련된 수많은 정보를 게시하고, 순간순간의 감정이 즉각 표출된다. 모든 것을 알거나 말하려 하며, 휴대전화와 온라인상의 모든 이들이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기 기대하는 것 같다. 공개되고 노출되는 것을 즐기며 이를 두려워하지 않는 ‘공개된 삶’의 팽창.
물론 공개된 삶은 사회망 서비스 확장의 직접적인 결과물은 아니다. 이미 우리를 둘러싼 자기고백의 수단과 장치가 많이 있었다. 텔레비전 토크쇼도 그렇고 케이블 텔레비전의 온갖 상담 프로그램도 이에 포함된다. 이른바 ‘리얼리티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라 불리는 것도 사적인 것을 공적 무대로 이동시키는 장치다. 인터넷 카페와 블로그도 수많은 개인사를 과감하게 익명의 다수에게 노출하는 통로다. 나를 누군가와 나누고 공유하려는 몸부림은 사교망 서비스라는 기술적 장치를 통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클릭과 링크,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접속과 연결. 손쉽게 올릴 수 있는 사진과 동영상, 데이터 파일과 누군가와의 대화록. 누군가는 외친다. “접속하고 말하고 관계 맺으라!”
자발적인 자기고백의 사회적 상호작용이 생활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즐거움을 제공하는 상황에서 이제는 종교적인 고해성사도 휴대전화로 처리하는 애플리케이션이 출현했다. 미국의 가톨릭교회가 이를 정식으로 승인했다. 아이폰 같은 이른바 ‘스마트한’ 휴대전화 앞에 서서 자기를 고백한다. 가톨릭 신자가 십계명을 지켰는지 점검하고 자신의 양심을 살펴보는 시간을 갖는단다. 교황 또한 SNS를 이용해 죄를 고백하는 것이 “전혀 죄가 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SNS나 ‘스마트 미디어’가 확장해가는 또 다른 자기고백 기제를 우리는 계속 목격하게 될 것이다. 말하고 실토하고 고백하라! 숨기는 것은 죄악이다.
고백의 상호작용, 그리고 자기 훈육
자신에 대해 무엇인가를 실토하고 고백하는 문화는 주로 종교와 정치적 차원에서 형성됐다. 고백의 문화는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성직자가 사람들을 훈육할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독특한 문화와 행위 패턴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즉 훈육과 정체성의 정치가 행해진 것이다. 예를 들어 16세기와 17세기의 유럽에서 루터파·칼뱅파·가톨릭파가 각자 독특한 고백과 훈육, 정체성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서로 경쟁했다. 성직자는 왕자나 관료의 종교적 신념을 확인받으려 그들에게 고백하도록 했고, 성직자 스스로 관료집단의 구성원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가정에서는 어떠했을까? 당시 유럽의 종교집단들은 아버지의 권위를 사회의 토대로 간주했다. 아버지는 성직자와 국가의 권위를 매개하거나 실행하는 지위를 갖는다. 가족은 아버지 앞에서 고백한다. 아버지는 가족을 훈육한다. 이같은 고백의 기술은 권력을 작동시키는 핵심적 요소다. 아버지, 성직자, 군주와 경찰, 선생님, 친구와 연인, 신용평가기관, 텔레비전, 그리고 사교망 서비스에서 서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실토와 고백, 혹은 이들이 서로에게 요구하는 고백을 상상해보라. 권력자가 요구하는 고백이 미디어와 SNS에서 요구하는 고백과 다를 수 있겠지만, 어찌됐든 우리는 사상, 정치적 입장, 취향과 기호, 욕망, 섹스, 병, 고민, 잘못된 행동 등에 대해 고백하고 서로 응대하며 위로받거나 처벌받는다(물리적 처벌이든 상징적 처벌이든). 고백의 범위가 넓어지고 있고, 강도가 세지고 있으며, 그 내용이 광범위하다. 굳이 고백하지 않아도 될, 혹은 고배할 필요 없는 것까지 우리는 사교망 서비스라는 이름을 빌려 별 의심 없이 고백한다.
과잉 커뮤니케이션과 과잉 고백
이 고백을 최종적으로 수신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등록된 친구? 연결과 관계맺기를 허락한 그 사람일까? 내가 보기에 SNS의 고백과 소통의 내용을 최종적으로 수신하는 이는 기업, 금융기관, 감시기관, 권력자, 관료, (상징적 은유로서) 아버지가 아닐까? 결국 그들이 우리를 기록·탐색·분석하며 수많은 훈육과 처벌, 유인과 포섭의 수단을 고민하고 있지 않을까? 고백과 소통의 내용은 연구와 과학적인 조사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우리에게 수많은 처방이 쏟아지며 매뉴얼처럼 잘 포장된 자기 다스리기의 지침이 불쑥불쑥 전달될 것이다. 내가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그것들은 언제든지 우리에게 전달되기를 기다린다. 동시에 자기고백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과 관련된 비밀을 발견한다. 즉, 고백은 고백하는 자의 비밀을 스스로 알게 해주는 통로다. 그래서 고백의 상호작용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파악하고 검토하며 조사·분석하는 과학적 주체이자 자기 훈육의 주체가 된다. 고백의 상호작용 속에서 내가 숨을 곳은 없으며, 모든 이가 나의 감시자가 될 수 있다. 항상 기록·분석·예측되는 공개적 삶을 둘러싼 거대한 파놉티콘의 체계는 이렇게 슬며시 촘촘히 완성된다. 우리는 누군가의 감시자이자 동시에 감시받는 사람이 된다. SNS는 이를 ‘사교망’이라는 이름으로, ‘소통’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 대한 관심과 보살핌’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은폐한다. SNS에서 글을 쓰고 남긴다는 것(우리는 이것을 ‘대화한다’고 표현한다)은 푸코가 글쓰기와 고백의 관계를 명확히 포착했던 것처럼, 고백의 주된 형식이다. 글쓰기(Writing)를 통해 자기의식과 감정을 검사한다. 글쓰기는 어쩌다 한 번도 아니고, 매일 밤 일기쓰기와 같은 것도 아닌, 매 순간마다 이뤄지는 행위로서 그야말로 ‘유비쿼터스’한 자기 검사의 행위다. 글쓰기의 길이에 상관없이 우리는 이 글을 씀과 동시에 자신의 마음·감정·생각·욕망을 관찰하고 정리해 보여주면서 동시에 이 글자들을 통해 스스로를 확신시킨다. 그리고 글쓰기의 반복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특정한 신념과 사상, 성향과 스타일에 정박시킨다.
숨고 침묵하고 절제하는 소통 기술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잠시라도 소통이 중단되는 경우를 참지 못하거나, 커뮤니케이션 환경의 진화 속에서 소통을 멈추지 않도록 강제당하고 있다. 우리는 눈을 떠서 다시 감을 때까지 수없이 다양한 형식과 대상과 내용의 소통을 수행한다. 끊임없이 문자나 음성을 주고받기 위해 휴대전화를 잠시라도 내려놓지 않는 사람, 신문이나 TV 뉴스를 보지 못하면 불안해하는 사람, 혼자인 시간을 참지 못하고 누군가를 찾아 대화를 소망하는 사람, 라디오와 텔레비전, 인터넷의 이야기들에 푹 빠져 지내는 사람, 혼자보다는 무리나 집단 속에서 불안함을 덜 느끼는 사람, 상품과 기호를 욕망하는 사람…. 지금 우리는 과잉 커뮤니케이션과 과잉 고백의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항상 긍정적인 것으로 이해됐다. 인간 존재론적 측면에서든, 사회에서의 기능적 측면에서든 우리에게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것이었다. 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은 사회적 존재의 조건이며 결과다. 누군가와 또는 무엇인가와 함께 존재하며 이들과 상호작용하는 것은 사회와 문화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로 인식됐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 확장은 인간의 문명화와 인간 존재, 사상 및 사회의 진보로 사고된다.
그러나 과잉 커뮤니케이션과 과잉 고백의 현실적 경험은 우리에게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철학을 요구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에서 대부분의 소재는 가십거리이거나 소문, 확인되지 않은 추측성 정보다. 인터넷이나 모바일 미디어 정보 환경에 대한 한국의 보수우파 정치인이나 지식인, 저널리스트들의 비난에 동의할 수 없지만, 우리의 커뮤니케이션 환경과 과잉 고백의 상호작용에 대한 문제에 대해 함께 고민할 때가 되었다. 너무나 많은 정보가 노출·악용되고 있으며,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침해되고 있다. 차분하게 검토되지 못한 정보가 순식간에, 그리고 폭넓게 전파되고 복제됨으로써 수많은 희생자가 생겨난다. 사교망 서비스에서 그렇게 많이, 그리고 자주 자신에 대해 고백해야 하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오히려 우리는 자주 침묵하고, 말을 아끼며, SNS에서의 고백적 글쓰기를 자제하거나, 자신을 숨기고 비밀을 만드는 자기기술(Self-technology)이 가지는 정치적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스스로를 기록하고, 검사하고, 검토하고, 분석하는 과학적 SNS 주체에 맞서보기. SNS는 계속 이런 요구를 던질 것이다.
글•이영주 내밀사회문화연구소장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1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