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E D I A/책방

겨자씨에게 하늘나라를 묻다

기린그린 2022. 10. 19. 11:27

사람, 즉 히브리어로 ‘아담’은 자신의 삶이 걸려 있는 땅, 즉 (아다마)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런 의미를 보면 사람은 하느님의 땅입니다. 사람들은 땅에다 곡식을 뿌리고 추수를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거두어들이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주님의 ‘거룩한 땅’이 되고, 특별히 우리 마음은 그분의 말씀의 씨앗을 받아들이고 싹 틔우고 열매를 맺는 ‘주님의 밭’이 됩니다. 

‘마음’이란 사전적 의미로 ‘감정이나 생각, 기억 따위가 깃들거나 생겨나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이 심어지고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마음의 밭갈이를 잘 해서 좋은 땅에서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갈라 5,22-23) 등 성령의 탐스런 열매를 맺기를 바라십니다.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 규정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도, 아무런 흠도 티도 없는 무결점의 사람이 되라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바리사이들을 호되게 꾸짖으신 것은 그들의 이중적이고 위선적 행동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바리사이’라는 어원이 뜻하는 바와 같이 자신들을 대중들과 ‘구분된 사람’ 또는 ‘분리된 사람’으로 인식하여 스스로를 흠 없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창녀와 세리는 상종해서는 안될 죄인이었고, 안식일을 어기는 예수님까지도 배척의 대상이었습니다. 

카를 융은 “나는 착한 사람이 되기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했지요. 불완전을 살아야 하는 피조물인 인간은 누구나 자신 안에 결핍을 안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죄스럽고 수치스러운 그림자가 항상 우리 곁에 따라다닙니다. 우리는 이 그림자를 탓하고 자책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그림자 속에 갇혀 살기도 하고, 반대로 자신의 그림자를 타인에게 투사하여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형제의 눈에 있는 ‘티끌’을 빼 주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해 간다는 것은 밀밭의 가라지를 뽑아내듯 그야말로 흠도 티도 없는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그림자를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화해하며 하느님 안에서 한 인간으로서의 전인성을 회복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인류의 타락과 속량’이라는 이분법적 교리에만 너무 익숙해져서, 자기 죄의 그림자 속에서 자책하며 속량의 날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일상 속에 신앙의 기쁨과 행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온 우주와 인류가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으로 창조되었다면 모든 만물은 하느님 사랑의 현존이며 축복입니다. 생태 문명 신학자 매튜 폭스는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에 창조계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탄생한 ‘원복 Original Blessing’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신앙은, 세속에서 죄를 짓고 교회로 와서 죄를 뉘우치고 사함받는, 마치 성과 속의 경계를 넘나들 듯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세상 속의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창조 때 이미 받은 축복을 회복하고, 하느님 안에서 그 기쁨을 누리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라고 하셨듯이, 우리가 관계 맺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 장소, 사물 안에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있습니다. 

렘브란트(1606-1669)의 그림, [탕자의 귀환]은 예수님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속에 담긴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의 깊은 의미를 하나의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렘브란트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이 젊은 시절 성공한 화가였고, 명문가의 딸과 결혼하여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이 넷 중 셋을 잃었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유일한 희망이던 스물일곱 살의 남은 아들마저 잃게 됩니다. 만년에는 빚에 쪼들리는 가난한 삶을 살다가 불행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탕자의 귀환]은 바로 렘브란트가 63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하기 전에 그린 그림입니다.

한때 그렇게도 자신만만하고 숭배를 받던 예술가였고,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윤락가에 서 있는 젊고 활기 넘치는 모습으로 자신을 그렸던 렘브란트가, 만년에 이르러 모든 것을 잃게 되면서 그동안 애쓰며 살아왔던 모든 영광이 헛되다는 것을 고통스럽게 자각하고, 누더기가 된 몸으로 아버지 품에 안긴 자화상이 바로 [탕자의 귀환]이라는 것입니다. 

[탕자의 귀환]은 어쩌면 우리의 마지막 여행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지상에서의 삶이 다하면 먼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온갖 욕망과 이기심, 질투, 분노, 경쟁심, 지배욕 등 지치도록 헛된 영광을 좇아 살고 있는 우리는, 어쩌면 우리 자신의 인생이 다해야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비유속의 아버지는 우리가 집으로 돌아온다는 그 자체로 멀리서부터 먼저 달려와 껴안고 입을 맞추어 주십니다. 내가 얼마나 독선적이고 완고한 삶을 살았는지, 얼마나 이기적이고 감각적인 즐거움만을 추구하며 살았는지 고백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 주고 잔치를 베풀어 주시며 당신 자녀로서의 품위를 되돌려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