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E D I A/책방

내일의 가능성: 나에게로 돌아오는 그림 독서 여정 (조민진)

기린그린 2022. 8. 29. 21:35

p.64 당신은 누구의 가슴속에 머물고 있는가 -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 & Blu

아오이와 쥰세이는 주저 없이 약속했지만, 서로가 약속을 지킬 거라고 확신하진 않았다. 약속은 그저 각자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약속이 꼭 지켜져야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약속하는 순간의 믿음, 사는 동안 잊히지 않는 말, 떠올릴 때 느끼는 아련함 따위가 약속을 약속답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아오이와 쥰세이는 약속대로 만났지만 만나지 못했어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으리라. 잊지 않고 서로를 오랫동안 기억했으니까. 혹시 아는가. 당신도 누군가의 가슴속에 '오래된 약속'으로 머물고 있을지.

 

"사람의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속밖에 없는 것이란다." ...

누군가의 가슴속. 

비 냄새 나는 싸늘한 공기를 들이켜며, 나는 생각한다. 나는 누구의 가슴속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내 가슴속에는 누가 있는 것일까. 

누가, 있는 것일까. - 로쏘 197쪽

 

p.86 삶이 고조되는 순간 - [몰입] 황농문

'그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오직 하나에만 몰두할 수 있는 순간들이 많기를 자주 갈망한다. 

빌 게이츠가 읽을 책만 잔뜩 싸 들고 홀로 은신하며 '생각 주간 think week'을 보낸다고 말했듯이,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오직 책 무더기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가 있다. 슬프고 가슴 아프더라도 결코 내게 상처를 주지는 않을 이야기, 영감과 감동을 주는 누군가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순간이면 나는 가장 순수하고 안전한 몰입 상태에 이른다. 나와 책 사이에서 밀도 높게 일어나는 화학작용이 좋다. 황농문 교수가 [몰입]에서 인용한 대로 "삶이 고조되는 순간"이다. '몰입 이론'을 창시한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플로우 flow'라고 이름 붙인 상태 말이다.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듯 느껴지거나, 물 흐르듯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이뤄진다는 몰입의 순간. 그 순간이 오면 나는 실로 삶이 무르익고 있음을 느낀다. 

p.90 [몰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대목은 '시냅스와 자아'에 대한 설명이었다. 시냅스는 뇌 속의 뉴런과 뉴런, 그러니까 신경세포와 신경세포의 연결 부위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경험이나 학습에 따라 계속 변하는 게 시냅스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시냅스에 학습 정봐 저장되면서 한 사람의 인격과 능력, 감정 등에 영향을 미친다. 결론적으로 인격이나 능력, 심지어 타고난 천성까지도 우리가 지속적으로 하는 생각이나 행동에 따라 변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황농문 교수는 [몰입]에서 "시냅스의 가소성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인과법칙이 우리 신경계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알려준다"며 "'내가 나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은 뇌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고 말했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과학적 매커니즘까지 몰랐어도 이미 그렇게 믿고 있었다.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온 걸 보면.

 

p.222  새로운 사랑 앞에서 퇴로를 끊다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기자의 일이란 즉각적인 판단이 요구되는 일이고, 대부분 흑과 백을 나눠 한쪽에 서야 하는 일이며, 회색지대의 모호함을 용납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그 일을 회의하게 됐고, 기자로 사는 게 불편해졌다. 

바로 이 지점이 하루키와 내가 공감하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너무 많은 것들에 즉각적으로 결론 내리지 않을 것이다. 섣부른 결론에 구속되고 싶지도 않다. 어떤 이슈나 문제들에 대해서는 '의견 없음'으로 살 것이다. 기자라는 직업을 예전만큼 사랑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건 여전히 어렵다.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대상에 대한 마음이 바뀐 이유를 밝히는 건 어쩐지 예의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사랑이 끝나도 추억은 남는다. 지난 세월 기자로서의 경험을 소중히 간직하며 앞으로도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을 것이다. 제 본분을 다하기 위해 밤낮으로 분투하는 동료 기자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첫 책을 낸 후부터 나는 얼마나 될지 모르는 나의 독자들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p.252 최고의 운명을 기다린다 - [레이트 블루머] 리치 칼가아드

꽃은 피면 지기 마련이고, 꽃봉오리는 언제나 활짝 핀 꽃으로 가는 가능성이고 약속이다. 레이트 블루머의 운명을 산다는 건 긴 시간 꽃봉오리로 사는 일이다. 늦게 꽃피기까지 더 많이 배우고 시도하는 미덕을 연마하는 일이다.

"사실 뭔가에 계속 매달려야 할 때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뭔가를 그만두고 방향을 바꿔야 할 때를 아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장래성이 없는 직장을 그만두지 않거나 유해하거나 불행한 인간관계를 하루라도 빨리 끝내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우리 자신에게 더이상 도움이 안 되는 일들을 그만둘 때, 우리는 우리의 의지력과 끈기를 해방시켜 정말 중요한 일들에 쓸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쓸 수 있는 시간과 관심의 양은 제한되어 있는 까닭이다." (284쪽)

끈기 있고,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이 나의 장점이다. 하지만 가다가 방향을 바꾸는 결단력에 대해서라면 그리 자신이 없었다. 기자라는 직업을 관두기 전까지는, 특별히 가던 길을 포기하거나 진로를 수정해야 할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어쩌면 그렇게 믿고 뭐든 끝까지 완성하는 데 집착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동요했다. 이제는 방향을 바꿀 때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왜 늘 멈추지 않고 계속 하는 것만이 좋은 답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만두는 게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거라고, 그만두는 건 자아 발견 과정의 일부이며 방향을 바꿀 힘이 필요한 일이라고 설파하는 대목을 읽는데 눈물을 쏟을 뻔했다. 이미 그린 그림을 버리기 아까워하기보다 새롭게 또다른 그림을 그릴 용기도 필요하다. 기왕 레이트 블루머가 되기로 했다면 말이다. 자신을 위한 솔직함과 자신을 수정할 수 있는 패기야말로 생의 중반기로 접어든 내가 비로소 갖춰야 할 미덕이었다. 

괴테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고 했다. 지금 올라 있는 컨베이어벨트에서 뛰어내려 방황하더라도 노력해보기로 한다. 레이트 블루머가 겪는 성장통일 것이다. 이제는 나를 옮겨 심는다. 우리에게는 언제든 더 새로운 자신을 상상할 자유가 있다. 궤도를 수정했다면 또다른 길을 그려야 한다. 뭐가 됐든, 최고의 운명을 찾아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