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2월 20일)
내가 일주일 뒤 한 카페에서 친구가 소개해준 이성과 만나기로 했다고 가정해봅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일주일을 기다립니다.
이번에는 정말 내 마음에 쏙 드는 이성을 만날 수 있을까?
내 인생의 반려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일까?
어떤 모습일까?
이 모든 생각은 어디서 떠오릅니까?
텅 빈 내 마음속에서 떠오릅니다.
일주일 뒤의 현실, 즉 미래의 현실은 내 마음속의 생각으로만 잠재해있습니다.
약속 장소인 카페도, 내가 만날 상대도, 미래의 나도, 내 마음속의 생각으로만 존재합니다.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하루하루 흘러가면서 미래의 현실은 점점 내 눈앞의 현실로 가까이 다가옵니다.
내가 몸을 움직여 미래의 현실을 향해 달려 나가는 걸까요?
아니면 미래의 현실이 시간을 따라 스스로 내 앞으로 달려오는 걸까요?
나는 몸을 움직여 스스로 미래의 현실로 달려 나갈 능력이 없습니다.
나는 시간을 끌어당길 수 없습니다.
미래의 현실이 시간의 흐름을 타고 점점 물질화된 모습으로 내 앞으로 달려오는 것입니다.
드디어 일주일이 시간이 지나 나는 약속한 카페에서 상대를 만납니다.
내 마음속의 생각으로만 잠재해 있던 미래의 현실이 물질화된 지금 이 순간의 생생한 현실로 내 눈앞에 생생히 펼쳐집니다.
생생한 현실을 만들어낸 생각은 누구의 마음속에서 떠오른 것입니까?
바로 텅 빈 내 마음속에서 떠오른 것입니다.
카페도, 상대도, 미래의 나도, 내 마음속의 생각이 만들어내는 빛의 움직임입니다.
나 자신이 내 생각으로 명멸하는 빛을 움직여 내 현실을 창조하는 창조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자인 나, 관찰자는 왜 내 생각으로 수많은 몸과 우주를 만들어 세상 경험을 하는 것일까요?
몸은 관찰자가 세상 경험을 하기 위해 100년 간만 흘러가다가 사라지도록 설계해 놓은 한시적인 장치입니다.
세상 경험이 끝나면 몸은 설계에 따라 사라집니다.
몸이 사라지면 몸의 오감이 인식하는 우주도 사라집니다.
세상을 경험하는 주체는 누구일까요?
‘몸’이라는 설계된 생각일까요?
아니면 생각을 물질화시켜 바라보는 관찰자일까요?
세상 경험을 하는 유일한 주체는 관찰자입니다.
생각으로 만들어진 모든 존재들은 경험자가 아니라, 경험의 대상입니다.
그렇다면 관찰자는 무엇을 위해 세상 경험을 하는 것일까요?
내가 카페에서 이성을 만나는 현실 자체는 그 순간만 지나면 사라지는 허상입니다.
하지만 마음속이 감정은 남아있습니다.
내가 내 맘에 쏙 드는 이성을 만나는 순간 어떤 감정이 올라올까요?
마침내 꿈에 그리던 인생의 반려자를 찾았다는 기쁨, 그리고 그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이 올라올 것입니다.
하지만 기쁨과 욕망 이면에는 아픔이 숨어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붙잡고 싶은 집착, 붙잡지 못할 때의 버림받은 두려움, 사랑과 숨바꼭질하며 올라오는 미움, 기쁨이 지나면 찾아오는 슬픔, 언젠가는 죽음으로 찾아올 이별의 아픔 등이 숨어있습니다.
이렇게 내 마음속에서 오르내리는 모든 감정들은, 있는 그대고 받아들여 느껴주면 아픔은 생기지 않습니다.
마음이라는 무한한 스크린 위에서 오르내리는 감정들은 내가 붙잡거나 억누르려들지만 않으면 나를 생생히 살아 움직이게 하는 생명력이 됩니다.
우리는 왜 가파른 롤러코스터를 오르내리며 환희와 공포를 느끼며 즐거워할까요?
롤러코스터가 놀이기구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 속에서 올라오는 크고 작은 감정들을 분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느껴보면, 현실은 고통의 바다가 아니라 살아있는 기쁨을 누리게 해주는 경이로움의 바다가 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쉴 틈 없이 애를 쓰며 고달프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세상은 정반대의 생각으로 만들어진 에너지의 세계입니다.
예컨대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을 ‘좋다’고 붙잡으려 들면, 짝이 되는 ‘미움받는다’는 생각은 ‘싫다’고 억누르게 됩니다.
사랑받고 싶어 나를 혹사하며 사는 것도 고통이고, 미움받을까 봐 두려움에 떨며 사는 것도 고통입니다.
만일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 엄마가 나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며, “너 정말 미워!”하고 말했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나는 미움받는 게 너무 무서워 입을 꽉 다물고 미움받는 아픔을 억눌러버렸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너무나 생생한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되돌아보면 어떻습니까?
과거의 현실은 어디서 떠오릅니까?
텅 빈 내 마음속에서 한 장의 이미지로만 떠오릅니다.
내 마음속의 생각이 만들어낸 인생 영화였습니다.
어떤 생각이 만들어낸 영화였습니까?
‘난 미움받는다’ 는 생각이 만들어낸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진짜라고 착각해 그 생각을 두려움으로 억눌려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내 마음속엔 두려운 상처로 남아있습니다.
이렇게 억눌러버리는 건 누구입니까?
몸을 나라고 착각하는 ‘개체 나’입니다.
몸을 나라고 착각하니 엄마가 남으로 보이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생깁니다.
창조자인 관찰자는 자신이 생각으로 창조된 영화를 억눌러버리지 않습니다.
영화를 바라보며 올라오는 아픔을 느껴볼 뿐입니다.
아픔을 느껴주면 영화는 흘러갑니다.
몸으로 된 나는 ‘난 미움받는다’ 는 생각을 두려움으로 억눌러버려, 스스로 미움받는 두려움 자체가 돼버립니다. 미움받을까 봐 남들의 눈치를 보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이나 행동도 못하고, 미운 짓을 하며, ‘미움받는 나’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미움받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뭘까요?
몸에 갇힌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자인 관찰자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몸을 가진 내가 어떻게 관찰자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내 마음의 시야를 넓혀 몸을 갖고 살아가는 내 인생 전체를 예컨대 100년쯤, 1,000년쯤 뒤의 먼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어떨까요?
어릴 때의 내 모습, 지금의 내 모습, 미래의 내 모습, 죽고 나서 묘비에 새겨진 내 이름을 마치 파노라마처럼 연속적으로 떠올려 바라봅니다.
이렇게 내 인생 전체를 멀리서 바라보는 건 누구입니까?
바로 몸을 벗어난 무한한 마음, 관찰자입니다.
내가 관찰자가 되면 몸을 가진 나는 관찰자 마음속의 이미지가 돼버립니다.
현실도 역시 이미지가 돼버립니다.
그럼 뭐가 남을까요?
내 몸에 달라붙었던 미움받는 두려움, ‘미움받는 나’만 남게 됩니다.
‘미움받는 나’는 어디서 태어났습니까?
바로 내 마음속에서 태어났습니다.
내 마음속에서 태어났으니 내가 낳은 내 마음의 자식입니다.
내가 낳은 자식을 억눌러놓고 외면했으니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 몸을 차지한 채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고 자꾸만 고통스러운 현실을 창조했던 것입니다.
‘미움받는 나’를 내가 낳은 자식으로 완전히 받아들이면 내 마음속으로 돌아옵니다.
그럼 짝이 되는 ‘사랑받는 나’와 합쳐서 텅 비어버립니다.
텅 빈 무한한 사랑 속으로 사라집니다.
나는 매 순간 텅 빈 무한한 사랑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릴 때의 나도 무한한 사랑 속에 들어있었고, 지금이 나도 무한한 사랑 속에 들어있고, 미래의 나도 무한한 사랑 속에 있고, 묘비 아래에 묻힌 나도 무한한 사랑 속에 들어있습니다.
나 자신이 무한한 사랑 속에 살아가는 피조물임을 깨달으면 현실은 어디서 펼쳐질까요?
무한한 사랑 속에서 펼쳐집니다.
나를 몸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면 현실은 어디서 펼쳐질까요?
상처받는 감정 속에서 펼쳐집니다.
피조물인 몸은 내 것이 아닙니다.
무한한 사랑이 내려준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내 것으로 착각해 나와 동일시하면 세상은 나와 분리됩니다.
그래서 분별심이 생기고 좋은 것은 붙잡고, 싫은 것은 억누르게 됩니다.
움직이는 모든 것은 움직이는 생각으로 창조된 허상입니다.
그래서 붙잡히지도 않고, 억눌리지도 않습니다.
고통만 키울 뿐입니다.
피조물인 몸은 아픔의 공간 속에 갇혀 살아갑니다.
아픔의 공간밖에 무한한 사랑의 공간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아픔의 공간을 멀리서 시야를 넓혀 바라보면 나는 아픔을 바라보는 무한한 사랑이 됩니다.
아픔의 공간에서 깨어나 무한한 사랑과 평화의 공간에서 ‘영원히 사랑받는 나’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M E D I A > 책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신이 옳다 - 정혜신 (1) | 2023.12.20 |
---|---|
달과 6펜스 (1) | 2023.12.20 |
영혼의 숨 쉬는 과학 (0) | 2023.07.08 |
자전거 여행 1 - 김훈 (0) | 2023.07.08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0) | 2023.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