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기본적인 태도도 타인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거예요. 깊은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 이해하기가 어려워지다가 사랑하는 순간부터는 이해 불가라고나 할까요. 표피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은 저도 잘 이해돼요. 이를테면 교차로에서 경찰이 제 차를 정지시킨다면, 그건 교통법규를 위반했기 때문이겠죠. 그렇게 만나는 경찰에게는 내면이 없어요. 하지만 그 경찰에게 관심을 갖는 순간부터 내면이 생겨요. 사랑하면 그 내면은 중층적인 깊이를 띠게 됩니다. 상대적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고독해질 수밖에 없어요. 가족 안에서 우리는 이 고독을 느껴요. 부모와 자식은 평생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에 버금가는 게 바로 연애하는 남녀죠. 우리는 대개 자기밖에 몰라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일이 거의 없는데, 사랑이라는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누군가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거죠. 저는 소설에서 욕하거나 막말하는 캐릭터를 등장시키지 않아요. 설사 그가 악당이라고 해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게 저는 싫어요.
하물며 주인공은 절대로 다른 사람을 욕할 수 없어요. 욕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세계관, 그러니까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세계관에 서 있다는 뜻이니까요. 제가 이해한 이 세계는 그런 세계가 아니에요. 제가 아는 세계는 '인간은 모른다'는 전제 위에 서 있어요. 그런 세계의 모습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게 연애라서 제 소설에서는 연애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거죠.
연애라고 했지만, 그건 현대인의 근본인 고독을 말하는 거예요. 다 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 가장 모르는 순간이라는 것, 그래서 우리는 고독해질 수밖에 없어요. 노력하는 한 헤맬 수밖에 없다는 말처럼요. 세상 사람들을 연구해서 그 행동 패턴을 다 파악하더라도 아무 소용 없어요. 우리는 한 번에 한 사람만 깊이 사랑할 텐데 바로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 애당초 그게 문제였거든요.
"집착을 완전히 버릴 수 있으려면 그저 불행을 겪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무런 위안이 없는 불행을 겪어야 한다. 위안이 있어서는 안 된다. 어떠한 위안이 나타나면 안 된다. 그럴 때 비로소 형용할 길 없는 위안이 위로부터 내려온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진 빚을 면해줄 것. 미래의 보상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과거를 받아들일 것. 시간을 순간에 정지시킬 것. 이것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
C.S. 루이스가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은 참 신기해요. 독서는 혼자서만 할 수밖에 없는데, 정작 책을 읽으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죠. 심지어 수천 년 전의 사람과도 서로 연결되기도 하고요.
작가로서는 소설 쓰기가 나를 치유해주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어요. 소설을 쓰는 일은 치유보다는 나를 넘어서는 일에 가까우니까요. 대신에 노트에다가 뭔가를 쓰는 일은 도움이 됩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노트에다 손으로 뭔가를 쓰면, 그것도 오랜 시간에 걸쳐서 쓰게 되면 마음이 정리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날마다 일정 분량의 글을 쓰는 일은, 신경안정제를 먹는 일보다 더 좋아요. 그게 무슨 내용의 글이든. 그때는 손으로 쓰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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