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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미

아가미P47. 곤은 비좁은 카운터 뒤에서 손바닥만 한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사흘 전 신문을 넘기고 있었다. 주인 부부가 다 읽은 신문이나 주간지를 슈퍼마켓 뒤쪽 재활용품 수거함에 넣어 두면 곤이 그걸 집어다 뒤적거리곤 했다. 곤은 자신이 언제부 터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살아왔는지를 떠올리지 않았다.비좁은 세상을 포화 상태로 채우는 수많은 일들을 꼭 당일 속보로 알아야 할 필요가 없으며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이 되 지 않기 위해 애쓸 필요 없고 속도를 내면화하여 자기가 곧 속도 그 자체가 되어야 할 이유도 없는, 아다지오와 같은 삶.그 어떤 행동도 현재를 투영하거나 미래를 전망하지 않고 어 떤 경우라도 과거가 반성의 대상이 되지 않으니 어느 순간에 도 속하지 않는 삶이었다모두 어제가 되어 부질없어진 인물..

M E D I A/책방 2025.01.19

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 김연수그날도 잠에서 덜 깬 멍청한 표정을 하고 화장실로 갔다. 집게로 창가 재떨이와 소변기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줍다가 '이 주의 금언을 언뜻 봤다. 계속 청소하다가 뭔가 이상해서 다시 봤다.『논어」의 한 구절이었다.“즐거워하되 음란하지 말며 슬프되 상심에 이러지 말자.”오줌이 묻은 양철 집게를 들고 서서 나는 웃었다. 한참 동안 웃었다. 웃음을 그치고 담배꽁초를 줍는데 다시 배시시 웃음이 터져났다. 이러지 말자가 아니라 '이르지 말자라고 해야 옳았기 때문이었다. 자꾸만 내 머릿속으로는 공자님이 이른 아침 왜 가야만 하는지도 모르고 가야만 하는 부대 화장실에서 집게로 담배 꽁초를 줍는 내 소매를 붙잡고 '김 일병, 이러지 말자. 우리 아무리 슬프되 상심에 이러지 말자라고 애원하는 광경이 ..

M E D I A/책방 2025.01.19

바깥은 여름 - 김애란

바깥은 여름노찬성과 에반 52p저물녘, 지평선 너머 끝없이 펼쳐진 아스팔트 위로 복 은빛이 번지면 할머니는 스스로 하루 노고를 치하하듯 담배를 꺼내 물었다. 능숙한 폼으로 고개 숙여 담배에 불을 붙인 뒤 "주여, 저를 용서하소서•····." 했다.- 할머니, 용서가 뭐야?아이스박스 캐리어 옆에서 흙장난을 치던 찬성이 물었 다.- 없던 일로 하자는 거야?할머니는 대답 대신 볼우물이 깊게 패게 담배를 빨았 다. 담배 연기가 질 나쁜 소문처럼 순식간에 폐 속을 장 악해나가는 느낌을 만끽했다. 그 소문의 최초 유포자인 양 약간의 죄책감과 즐거움을 갖고서였다.- 아님, 잊어달라는 거야?찬성이 채근하자 할머니는 강마른 손가락으로 담뱃재 를 바닥에 톡톡 털며 무성의하게 대꾸했다.-그냥 한번 봐달라는 거야.그렇지만 찬..

M E D I A/책방 2025.01.19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당일치기로 가보고 싶구나 천국에종이랑 펜 찾는 사이에 쓸 말 까먹네아무 맛 없는 싱거운 조림 실은 며느리 배려세 시간이나 기다렸다 들은 병명 “노환입니다”개찰구 안 열려 확인하니 진찰권일어나긴 했는데 잘 때까지 딱히 할 일이 없다넘어질 뻔해서 뒤돌아봤더니 아무것도 없는 길연명 치료 필요 없다 써놓고 매일 병원 다닌다깜빡한 물건 소리 내어 말한 뒤 가지러 간다만보기 숫자 절반 이상이 물건 찾기몇 줌 없지만 전액 다 내야 하는 이발료이것도 소중해 저것도 소중해 그러자 쓰레기 방눈에는 모기를 귀에는 매미를 기르고 있다쓰는 돈이 술값에서 약값으로 변하는 나이젊게 입은 옷 자리를 양보받아 허사임을 깨닫다내용보다 글자 크기로 고르는 책생겼습니다. 노인회의 청년부찾던 물건 겨우 발견했는데 두..

M E D I A/책방 2025.01.19

이처럼 사소한 것들

P110. 펄롱은 대화에 끼지 않고 거리를 두면서 다른 생각을 했 고 상상에 빠졌다. 그러다가 다른 손님들이 더 왔고, 긴 의 자에서 옆으로 이동한 펄롱은 거울 앞에 앉아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똑바로 보며 네드와 닮은 데가 있는지 찾았다.닮은 데가 보이기도 하고 안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윌슨 네 집에 있던 여자가 둘이 친척이라고 여겨 닮았다고 착 각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것 같진 않았고 필롱 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네드가 심히 힘들어했던 것. 어 머니와 네드가 늘 같이 미사에 가고 같이 식사하고 밤늦은 시간까지 불가에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것을 생각하며 그게 무슨 의미일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펄롱으로 하여금 자기가 더 나은 혈통 출신이 라고 생각하게..

M E D I A/책방 2025.01.19

모비 딕

P309. 그런 연유로 이 불경스러운 백발의 노인, 저주를 퍼부으며 욥의 고래를 쫓느라 전 세계를 도는 선장이 여기 있게 된 것이다. 그의 선원들은 주로 배교자, 무뢰한, 식인종으로 이루어진 잡놈들이었는데, 정신적으로 나약하기까지 했다. 스타벅은 미덕과 올곧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남의 도움을 얻지 못했으므로 무능했고, 스터브는 무심하고 무모한 성격 탓에 늘 유쾌하기만 했으며, 플래스크는 어느 모로 보나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간부 선원들의 지휘를 받는 선원들은 어떤 악마 같은 운명이 에이해브의 편집증적인 복수를 돕기 위해 특별히 가려 뽑은 자들처럼 보였다. 그들은 어째서 노인의 분노에 그토록 열렬히 응답했을까. 대체 어떤 악마적인 주술에 영혼이 사로잡혔기에 때때로 그의 증오를 자신들의 증오처럼 ..

M E D I A/책방 2024.12.10

변신 - 카프카

이번에는 우유 대신에 무엇을 가져다 주려나 하고 그레고르는 기대를 걸고 이것저것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누이동생이 정성껏 들고 온 것을 보고는 그는 다시 말문이 막혀 버렸다. 누이 동생은 오빠의 식성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음식물을 한꺼번에 가지고 와서 그것들을 낡은 신문지 위에다 펼쳐 놓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반쯤 썩은 야채와 가장자리에 흰 소스가 말라붙어 있는 저녁 식사 때 먹다 남은 뼈다귀, 건포도 몇 알, 그레고르가 이틀 전에 이런 것도 먹을 수 있느냐고 핀잔을 주었던 치즈,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마른 빵과 버터를 바른 빵, 똑같이 버터를 발라 소금을 뿌린 빵, 그리고 물을 담은 그릇이 있었다.아무래도 이것은 그레고르를 위해 정해 놓은 음식인 모양이었다.  아버지의 변신 그는 더욱 느리게..

M E D I A/책방 2024.12.10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대화체 예문 장강명. ‘간장에 독’  놀랍게도 이중구는 그답지 않게, 고씨투어의 주인이 바뀐다는 사실은 미리 알고 있었다. 내가 이걸 언제부터 알고 있었느나고 문자 그는 "갑작스럽게 결정된 거긴 한데, 낌새는 한 달 전쯤부터 있었어"라고 대답했다."그러면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임원들은 다 짐 싸서 집에 가게 될 거야. 고씨 일가 사람들이니 까. 대표는 외부에서 올 거고. 이 사모 펀드가 외국계 컨설팅 회사 출신을 선호하더라고, 매킨지나 보스턴컨설팅그룹 같은 곳에서 오 겠지. 우리한테는 좋은 일이야, 어쨌든 지금 이 펀드가 돈이 있고, 고씨투어가 이 위기만 넘기면 장래성이 있다고 믿고 있으니까. 지 금 여행 업계는 다 죽을 지경이지만 자금 시장에는 돈이 흘러넘치 거든. 투자를 받든지 증자를..

카테고리 없음 2024.12.09

데리다와의 데이트 - 강남순

”사실이란 없다. 해석만 있을 뿐이다.“ - 니체 P36.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순간, '애도'는 시작된다. 내가 관계하는 타자와 나는 언젠가 '이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이별이 자의적 선택 에 의해서든 또는 육체적 죽음에 의해서든 모든 만남은 '언제나 이미 헤어짐을 품고 있다. 데리다와 데이트를 시작하는 순간, 우리의 애도 역시 시작된다. 불가능성의 세계에 대한 열정 그리고 이 삶에 대한 고도의 인정(afimation)을 중요한 가치라고 가르쳐주는 데리다와 데이트를 시작하는 순간, 우리의 애도는 이미 시작되었다. “나•우리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 P384. 데리다에게 종교란 단일한 집합체가 아님을 매번 상기해야 한다.데리다가 신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그것은 언제나 인용부호 속의 '신앙..

M E D I A/책방 2024.12.09

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P17. 그걸(유언장) 쓰려면 생각해야 했다.어디서부터 모든 게 부스러지기 시작했는지.언제가 갈림길이었는지.어느 틈과 마디가 임계점이었는지. 어떤 사람들은 떠날 때 자신이 가진 가장 예리한 칼을 꺼내든다 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가까웠기에 정확히 알고 있는, 상대의 가장 연한 부분을 베기 위해 반쯤 넘어진 사람처럼 살고 싶지 않아, 당신처럼.살고 싶어서 너를 떠나는 거야.사는 것같이 살고 싶어서.  P77. 그러던 언젠가부터 엄마가 싫어지기 시작했어. 그냥, 이 세상이 역겨운 것처럼 엄마가 역겨웠어. 나 자신이 혐오스러운 것과 똑같이 엄마가 혐오스러웠어. 엄마가 해주는 음식이 지긋지긋하고 흠집투성이 밥상을 꼼꼼히 행주질하는 뒷모습이 끔찍하고, 옛날식으로 틀어올린 하얗게 센 머리가 싫고, 무슨 벌을 ..

M E D I A/책방 2024.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