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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여름이 -김연수

기린그린 2025. 1. 19. 21:42


나 혼자만
P17. 나는 매일 너에게서 뭔가를 배웠어. 네 앞에서는 좋아하는 것들만 생각하기. 태풍이든 장마든 뭔가 몰아칠 때는 그때야말 한없이 나태해지고 게을러지기. 지금 이 순간, 기다릴 만한 것을 기다리기. 아무리 작고 사소하더라도 변화에 민감하기. 비 가 그친 뒤 바람의 미세한 변화나 '오늘은 산책을 나가도 되지 않을까?' 같은 생각들을 흘려보내지 말고 알아차리기. 좋아하 는 것들 앞에서는 온몸으로 기뻐하기.
내 미약한 마음마저 그대로 느끼던 네가 어찌나 경이롭던지.
그런 네게 "아니, 아직은 안 돼"라고 웃으며 말할 때, 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P104. # 코멘터리 03
•그전까지의 삶은 혼자서 꾸는 꿈과 같다고 말씀하셨잖아 요"
"그렇습니다."
"그전까지의 삶이 꿈과 같다면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슬픔이 남아 있을 수 있나요? 아내분의 죽음은 꿈속의 일이 아닌가요?
제 말은 허공을 먹고도 배가 부를 수 있느냐는 뜻입니다."
"물론 여기에 슬픔은 없습니다. 하지만 생각이 시작되면 달 라집니다. 생각이란 어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 니까요.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을 때처럼 저는 이야기 안에서 실제로 웁니다. 이 현실은 언제나 몰입할 수밖에 없는 영화나 책입니다. 영화관에서는 영화 속으로 들어가려고 해도 스크린 에 부딪힐 테지만 이 현실 속으로는 매끄럽게 들어갈 수 있습 니다. 물을 상상하시면 됩니다. 손만 뻗어도 이야기 속으로 휩 쓸려 들어갑니다. 그렇게 이야기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면 모든 것은 반복됩니다. 물결에 휩쓸린 저는 울고 웃지요."
"그렇게 이야기 속으로 한번 빠져들면 다시 깨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런 생생한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깨어 있 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것이었다.
"이야기 속에 있으면서도 거기에 젖지 않으면 됩니다. 이 슬 픔과 울음은 제가 이야기 속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슬픔과 울음도 제게는 진실이고 제가 이야기 속에 있다는 것도 진실입 니다."
"젖지 않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한번 깨어나게 되면 제 쪽으로는 늘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 렇게 마른 상태에 대해 알게 되죠. 그러면 이전까지의 삶이 젖 은 상태였다는 것을 저절로 깨닫게 되고요. 마른 상태일 때의 저는 생각을 믿지 않습니다. 모든 이야기는 플롯으로만 보입니 다. 기승전결. 모든 일들은 어떤 결론으로 향하는 과정이지요.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다만 안심과 침묵만 남습니다."
"그러니까 그때그때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믿지 않 고 이야기의 뼈대를 보게 되면 젖지 않고도 이야기 속에 들어 갈 수 있다는 뜻이군요." 신기철씨에게 한 번 더 확인했다.
이전의 삶에서 저는 말로 연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때는 실제의 나와 연기하는 나 사이에 어떠한 간극도 없었습니다. 연기란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모두 믿는 일입니다. 하 지만 아내를 잃은 뒤부터 그 일이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말했 다시피 저는 행동하는 나와 관찰하는 나, 그렇게 둘로 나누어 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다가 그 활주로에서 바람을 맞으며 깨 어난 거죠."

P262. '살아간다'는 건 우연을 내 인생의 이야기 속으로 녹여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자면 우연이란 '나'가 있기에 일어난다 는 사실을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행운과 불운이 그 모습을 달리하는 게 인간의 우연한 삶이다. 결국 우리에게는 삶에서 일어나는 온갖 우연한 일들을 내 인생으로 끌어들여 녹여낼 수 있느냐, 그러지 못하고 안이하게 외부의 스토리에 내 인생을 내어주고 마느냐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우연을 '나'의 인생으로 녹여낼 수 있는 사람은 모든 우연에 서 새로운 시작을 발견한다. 미야노가 모임에서 한 번 만났을 뿐인 이소노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태도에서 비롯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언제라도 자신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설사 죽음의 선고를 받았다고 하더라 도 말이다.

P265. 다음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우리에게 남긴 지침이다.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좋아하는 것을 하라.
그는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제일 먼저 이기적인 마음을 버린다. 자기 이익부터 챙기려는 탐욕의 마음에서도, 나만 손해본다는 두려움의 마음에서도 벗 어난다. 그다음으로 겸손해야 한다. 남을 깎아내리면서 자신을 치켜세우려는 욕망에도 답하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에 답하려는 마음에서 벗어나 아이를 돌보는 엄 마처럼 삶의 주인이 되어 지켜보는 마음을 얻는다. 그러면 저 절로 내면에 고요함이 찾아온다. 좋아하는 것에 대한 갈망도, 싫어하는 것에 대한 혐오도 없는 이 고요한 마음으로 매 순간 풍요롭게 펼쳐지는 너무나 많은 삶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상 태가 미야노가 말한, 우연한 만남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세계 속으로 뛰어든 상태일 것이다. '사랑한다'라는 동사는 매 순간 새롭게 펼쳐지는 세계와 대면한 사람의 역동적 순응을 뜻한다. 자기 앞의, 어쩌면 우연으로 가득한 삶을 기꺼이 받아들임, 그 러므로 이 세계 안에서 타자와 함께 매 순간 새롭게 시작하기.
사랑이란 지금 여기에서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결심이다. 그 게 우리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이다. 사랑하기로 결심하면 그 다음의 일들은 저절로 일어난다. 사랑을 통해 나의 세계는 저 절로 확장되고 펼쳐진다.
그러니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길. 기뻐하는 것을 더 기뻐 하고, 사랑하는 것을 더 사랑하길. 그러기로 결심하고 또 결심 하길.
그리하여 더욱더 먼 미래까지 나아가길.

P270. 엄마가 걸레질을 시작하면 나는 그 등 에 올라탔다. 엄마는 귀찮다는 내색도 하지 않았다. 내 몸무게 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사람처럼 엄마는 수월하게 걸레질을 했 다. 나는 엄마를 안고 매달렸다. 걸레질이 끝나면 엄마가 가게 로 나간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엄마와 떨어져 사는 일에 익 숙해져야 할 테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엄마에게 껌 딱지처럼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제과점 문을 열기 위해 나가면 집에는 나 혼자 남았 다. 엄마가 닦은 장판은 유리처럼 매끄러웠는데, 그 장판으로 햇빛이 비쳐드는 때가 있었다. 바로 그때 생겨나는 마음이 있 었다. 창을 통과한 빛은 영화관 영사기의 불빛처럼 장판까지 길게 이어졌다. 그 빛줄기 안에는 수없이 많은 것들이 떠다녔 다. 먼지들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반짝였다. 나는 먼지들 을 잡기 위해 손을 뻗기도 하고, 그 속으로 들어가 빛을 바라보 기도 했다. 그럴 때면 저절로 눈이 감겼다. 머리를 움직이다보 면, 어디에 태양이 있는지 느껴졌다. 눈꺼풀 위로 그 환한 느낌 이 그대로 전해졌다. 눈을 떴다가 다시 감으면 빛의 잔상이 눈 꺼풀 안으로 들어왔다.

눈을 감으면 나타나는 무한한 어둠 속에서 그 잔상은 이리저 리 움직였고, 나는 그 잔상을 따라갔다. 그걸 '유령 이미지Ghost Image'라고 부른다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됐다. 나라면 더 근사한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그 빛의 잔상을 따라갈 때마다 내겐 이 루 말할 수 없이 평화로운 마음이 생겼으니까. 잔상을 따라 생 겨난 그 마음은 잔상이 사라지면 따라 없어졌다. 그래서 나는 그 빛이 사라지지 않도록 몇십 분이라도 들여다볼 수 있는 방 법을 찾아냈고, 나중에는 빛을 보지 않고도 그 잔상을 만드는 법을 알게 됐다. 그래서 잠들기 전이면 으레 눈을 감고 그 잔상 을 바라보곤 했다. 덕분에 나는 늘 평화롭게 잠이 들었다.

P281. 어둠 속에서 그 말을 받아적었다.
아침에 깨어서 보니, 공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잘못된 선택은 없다. 잘못 일어나는 일도 없다.
나는 그 말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침 사이에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넣어 연결해봤다.
잘못된 선택은 없다. 잘못 일어나는 일도 없다. '그러 므로'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좋아하는 것을 하라.
그러므로, 너무나 많은 여름이,
너무나 많은 골목길과 너무나 많은 산책과 너무나 많은 저녁 이 우리를 찾아오리라.
우리는 사랑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
할 수 있으리라.
내 나이 때의 엄마를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것 처럽 먼 훗날 내 나이 때의 열무를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