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내가 최고로 존경하는 철학선생님, 鄭達龍 신부님의 글이다. 부버의 생애와 그의 철학을 바탕으로 '나'와 '너'의 진정한 만남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신부님의 글은 비슷한 문장이 반복되면서 읽는 사람이 그 뜻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생각하도록 만드는 특징이 있다. 조금은 줄여보겠지만, 글의 특징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엇보다도 자기를 지키려 한다.
그러한 나머지, 우리 자신의 문을 안으로부터 굳게 걸어 잠가 놓은채 살아가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서 우리 자신의 주위에 높다란 담을 쌓아놓고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지키고 보존하는데 매달려 있는 한, 점점더 초라해지고 만다.
그는 점점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되어 버리고 만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엇갈림'뿐이라면, 그는 점점 더 초라해져 가는 것이다.
'만남'이 없는 곳에서는 그리고 '엇갈림'만 있는 곳에서는 하나의 사물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하나의 대상對象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곳에서는 '나'라는 것 역시 마치 하나의 사물처럼 처리되어 버리고 만다.
'만남'이 있는 곳에서, 비로소 '나'는 바로 나여야 하고 다른 것으로 대치해 버릴 수 없고,
또한 다른 사람으로 대신해서는 안되는 그러한 나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만남'이 없는 곳에서는, '엇갈림'만이 있는 곳에서는,
'너'라는 것 역시 마치 하나의 사물처럼 다루어지고 만다.
'만남'이 있는 그곳에서 비로소 '너'는 바로 너이어야 하고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고
또한 다른 사람으로 대신해서는 안되는 그러한 너일 수 있게 된다.
'만남'이 벌어진 후, 나는 이전의 나와는 전적으로 다른 그러한 나로 변한다.
'만남' 그것이 내 삶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으로 바꿔 놓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나를 자신 속에 가두어 두기를 그치고, 나 자신을 열게 된다.
즉 '만남' 속에서 얻어 만난 '너'를 향해서 나 자신을 활짝 개방해 놓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나 자신을 통째로 '너'에게 걸게 된다.
이때, 내가 나 자신을 '너'에게 건다고 해서, 내가 너를 마지막까지 알아서가 아니다.
내가 '너'를 끝까지 그리고 남김없이 파악해 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마지막까지 알 수 있는 것, 그것은 하나의 사물이다.
우리가 끝까지 그리고 남김없이 파악해 버릴 수 있는 것은 하나의 대상이다.
따라서 나는 '만남' 속에서 얻어 만난 '너'를 결코 마지막까지 알아 낼 수는 없다.
나는 그러한 너를 끝까지 그리고 남김없이 파악해 버릴 수는 없다.
오히려 '나'는 '너'를 만났기 때문에,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너'를 알고 싶어한다.
결코 마지막까지 알아 낼 수는 없는 너를 한없이 조금씩 이해해 나가려 하게 된다.
결코 끝까지 알아낼 수 없는 '너'
결코 남김없이 파악해 버릴 수 없는 '너'
그것이 나를 줄곧 놀랍게 하고 그리하여
나를 사로잡아 버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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