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테러 2주년 추도식을 한지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그 두 사람의 운명은 미국의 두 얼굴이요, 모순을 비유한다. 테러용의자로 지목했던 아랍인이 갑자기 총에 맞아 피살되는 현장에서 만취가 되어 조카 곁으로 돌아온 폴에게 숱한 영혼들의 속삭임을 반주로 아....!!
무척 오랜만에 빔 벤더스 감독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풍요의 땅(Land of Plenty) 미국.
사람들의 경각심이 해이해졌다며 도시를 순찰하는 폴은
월남전 특수공작원 출신이다.
‘길거리에 놓은 가방 안에는 폭탄이 들어있을 것이고,
아랍인이 건네는 상자 안에는 화학전에 쓰일 약품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아니, 그럴 리가 없다. 누군가 우리를 해치려 한다.
나는 내 자랑스런 조국을 구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수없이 조국의 안전에 대한 책임을 되새기며 삶의 의미를 가다듬는 폴은
언제 또다시 터질지 모르는 테러에 대비해서 특별히 아랍인들을 감시하고,
도시의 일거수일투족을 녹화하며 보고를 남긴다.
기억 속의 전쟁이 끝나지 않은 폴의 전장은 로스앤젤리스,
미국에서도 노숙자가 제일 많아서 빈민의 수도라 불리는 이곳에
하나 밖에 없는 가족인 삼촌을 찾아온 라나는
아프리카에서 태어나 아랍에서 살다가 텔아비브에서 날아왔다.
흑인 목사가 운영하는 '생명의 빵'이라는 선교원에 머물면서
노숙자들 급식을 도우며 삼촌과의 만남을 기다리는 라나.
미국 밖에는 시선을 돌려본 적이 없는 애국자 폴은
조국을 배신했을 뿐아니라 적대국을 떠돌아다닌 여동생을 용서할 수 없어서
그녀가 보낸 숱한 편지를 한 번도 뜯어본 적이 없다.
그런 폴에게 라나의 존재는 미국 이외의 세계를 대표한다.
자유롭고 누구에게나 개방적인 그녀는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선행과 봉사에 익숙한 천사 같은 존재다.
조카에게 자신의 정체를 처음 밝히는 폴,
이제 유가족에게 시신을 돌려주려는 라나와
아랍인이 속했을 테러조직을 소탕하려는 폴의 어색한 여행이 시작된다.
마침내 죽은 아랍인의 마을에 도착한 폴과 라나.
라나는 그의 집에 가서 죽은 이의 형을 만나 위로하지만,
전투태세에 돌입한 폴은 완전무장을 하고 적진에 뛰어든다.
그러나... 대낮에 적외선 안경까지 끼고 뛰어든 곳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중년 여성이 누워있는 방이다.
리모콘의 고장으로 온종일 한 채널만 보던 그녀는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라고 외치는 부시 대통령만 만나야 했다.
폴이 TV를 한대 치니까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가 난다.
이 상황이 바로 폴의 인생이었던 것이다.
쉼없이 자신을 괴롭히던 악몽은 더욱 격렬하게 상처를 헤집는다.
자신의 부하를 모두 잃고 추락하는 그 악몽은 월남전 이후의 것이었지만,
9.11 사태 이후 다시 더 강력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아름다운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바라보고 있을 때 목격한
비행기 테러는 그에게 끔찍한 전쟁의 기억을 되살려 주었고,
그로 인해 희생된 국민들의 원혼은
폴이 앓고 있는 고엽제후유증마저도 감추게 한 힘이 된 것이다.
군복을 벗고,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마주 앉은 삼촌과 조카,
삼촌은 미국의 상처를 이야기 하지만,
조카는 그와는 전혀 다른 시선을 이야기한다.
"다른 여러 나라에서는... 우리나라를 좋아하지 않아요.
죽은 사람들은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거에요."
그리고 이어지는 또 한번의 여행...
이제는 그 두 사람이 함께 미국의 상처에 다가간다.
레너드 코헨의 'land of plenty'가 멋지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빔 벤더스 특유의 로드씬(road scene)이 펼쳐지고,
(정말 몇 번이고 다시 보고 싶은 장면이다)
LA에서 뉴욕까지 횡단한 폴과 라나는
세계무역센터가 복구되는 현장을 내려다본다.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했으나 평범한 공사장으로 보이는 것에 실망한 폴에게
라나의 제안은 참 지혜롭고 따뜻하다.
"우리 여기서 떠난 영혼들의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요."
코헨 아저씨가 또 한번 멋지게 노래를 부르면
마치 죽은 사람의 이름인듯 엔딩크래딧이 올라간다.
영화를 통해 말하는 빔 벤더스의 언어는 정말 사려 깊은 것이고,
그의 시선에는 따뜻하고 조심스런 연민이 가득차 있어서
보는 사람의 섣부른 가치판단을 거두어 들인다.
그것이 바로 지루한듯 이어지지만 중요한 말을 하고 있는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다른 시선을 마주한다는 것이
이렇게 멋지고 아름다운 일이구나.
감독 : 빔 벤더스 http://www.wim-wenders.com/
제작 : 미국/독일. 2004년.
주연 : 존 딜(폴). 미첼 윌리암스(라나)
수상 : 2004년 베니스 영화제 유네스코상.
영화 공식홈 http://www.landofplenty.co.kr/index.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