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시작부터 '얼굴'이라는 것이 나에게 화두가 되었다.
매스미디어 수업 첫 시간, 한 학생이 페르소나를 들고 이야기를 꺼낸 것을 시작으로
수없이 낯선 얼굴들을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페이스북에 이르기까지
얼굴의 철학은 올 한해 내 머릿속을 점거하고 지휘했다.
그 학생 덕분에 알게된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12 - 1995.12.25),
강영안 교수님이 정리해놓으신 그의 사상을 접하면서 한 줄 한 줄 감탄해마지 않았다.
나치하의 그 혹독하고 잔인한 현실을 겪으면서 어떻게 이런 관점을 탄생시킬 수 있었을까?
타인에 대한 그의 철학은 진정 아름답고 숭고하다.
끊임없이 '나' 를 두드려 깨우고 '나' 밖으로 이끌어내는 타인,
내 존재의 숭고함과 참된 인간성을 일깨워주는 타인,
그때마다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면서 나의 낡은 틀을 부수고 들어오는 얼굴들,
그 존재가 짊어진 모든 것에 기꺼이 나의 지평을 열어젖히게 만드는 타인,
그들의 얼굴이 호소하는 가운데 드리워진 하느님의 흔적을 알아보고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환대하는 기쁨,
타인에게 나의 미래를 내어 맡기고 투신할 수 있는 자유...
이것이 내가 올해 발견한 성탄의 선물이다.
얼굴의 현현
타인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레비나스의 철학적 사유은 타인의 존재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밝히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는 타자와의 관계를 “얼굴의 현현”을 통해 접근한다.
얼굴의 현현은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물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 즉 참된 인간성의 차원을 열어 준다.
얼굴은 일종의 계시다. 얼굴은 나의 입장과 위치와 상관없이 스스로 자기를 표현하는 가능성이다.
얼굴의 현현은 일종의 윤리적 호소이다. 얼굴은 나에게 명령하는 힘으로 다가온다.
이 힘은 강자의 힘이 아니라 상처받을 가능성, 무저항에서 오는 힘이다.
예컨대 궁핍 속에 있는 이웃은 우리에게 윤리적 명령에 직면하게 한다.
그의 궁핍과 곤궁은 하나의 명령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나는 얼굴의 호소를 거절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때 나는 불의를 저지르는 셈이 된다.
얼굴이 자기 스스로 내보이는 방식을 레비나스는 ‘계시’라 부른다.
계시라는 종교적 용어를 쓴 까닭은 얼굴의 현현은 내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타나는 절대적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타자의 얼굴 현현은 하나의 모순에 직면하게 만든다.
얼굴은 타자의 무력함과 주인됨을 동시에 계시하기 때문이다. 가장 낮은 것은 가장 높은 것과 결합한다.
“타자는 타자로서의 높음과 비천함의 차원에 처해 있다.
영광스러운 비천함. 타자는 가난한 자와 나그네, 과부와 고아의 얼굴을 하고 있고
동시에 나의 자유를 정당화하라고 요구하는 주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나는 내 자신을 벗어나 그를 모실 때 비로소 그때 그와 동등할 수 있다."
향유는 세계를 즐기고 살아가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모습이다.
사람은 자기 집을 짓고 집안에서 편안히 살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무신론적’이다.
무신론적이란 내가 나아인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어느 것에도 참여하지 않고
오직 내면적인 존재로서만 내 집에 머물러 편안하게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타자가 나타날 때 상황은 달라진다.
타자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내 집 문을 더 꽁꽁 걸어 잠그거나 아니면 내 집의 빗장을 열어 그를 맞아들여야 한다.
타자의 얼굴은 단지 내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위에서’, 저 높음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위에서’ 오는 타자는 나의 자유를 문제 삼고 나의 소유를 문제 삼는다.
내가 타자를 내 집으로 받아들이는 것, 즉 그를 내 손님으로 환대하는 가운데 구체적 윤리성이 시작되며
내 자신은 내면성, 내재성의 세계를 벗어나 진정한 초월적 주체, 도덕적 주체가 될 수 있다.
얼굴의 출현으로 얼굴과 얼굴이 서로 마주할 때 나는 빗장을 건 채 빈손으로 그를 맞아들일 수 없다.
나에게 질책을 호소하는 타자의 저항을 대할 때
나는 누구로부터도 침해받을 수 없는 나의 행복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나의 책임이며 나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148-149. 152)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는 나와 너의 친밀한 관계 속에 용해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타자는 나에게 ‘낯선 이’로 남아 있다.
타자는 나에 대해서 완전한 초월과 외재성이다.
레비나스의 타자는 내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무한성이다.(p.36)
책임과 대속적 주체
배고프고 헐벗은 가운데, 사회적 불의 가운데 나에게 호소해오는 타인은
지금까지 제한 없이 자유를 행사하던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온다.
타인은 그의 벌거벗은 얼굴을 통해 나를 판단하고 정죄한다.
타인은 나를 고발하고 호소한다.
나는 타인에게 주격으로서가 아니라 목적격으로, 다시 말해 죄 있는 자로 고발된다.
나는 타인에게 갇힌 자로, 타인에게 ‘볼모’로 붙잡힌다.
타인의 얼굴의 호소를 통해 나는 나의 자기중심적인 삶에 대해 대답하도록 요구받는다.
이 요구로 나는 상처받고 고난 받는다.
도망을 시도해도 불가능하다. 타인은 나를 끝까지 따라온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타인이 나를 정죄하고 사로잡음을 ‘끝까지per-' ’따라와secui' 괴롭힌다는 뜻으로 ‘핍박persecution' 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렇게 타인에 대해서 심지어 희생자가 되기까지 비천해지고
마치 예수가 말했듯이 머리 하나 눕힐 곳 없는 존재가 된다.
이처럼 타인의 얼굴로부터 오는 윤리적 호소는 나에게 행복을 주기보다 오히려 고통을 준다.
나만이 누리던 자유가 부당함을 일깨우고 타인을 수용하고, 내 것을 내어놓고 타인을 환대하도록 요구한다.
응답을 요구하는 타인의 부름에 내가 ’응답할 때, ‘나를 ’응답할 수 있는‘ 존재로 세울 때
나는 비로소 ’응답하는 자‘로서 ’책임적 존재‘ 또는 윤리적 주체로 탄생한다.
타인의 일깨움에 대한 책임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나를 ‘윤리적 불면’으로,
나를 타인에 의해 사로잡힌 존재로 몰아넣는 일에 머물지 않는다.
타인의 일깨움은 나를 높이 세워주고 나를 고귀한 존재로 만든다.
타인은 나에게 문자 그대로 “혼을 불어넣어주며 in-spiration" 나에게 ”영을 집어넣어“준다.
타인은 나의 호흡이며, 나의 혼이며 나의 영이다.
그러므로 ‘타인에 대한 책임,’ 곧 타인이 나에게 일깨워준 책임은 나를 움직이고,
살아 있게 만들며, 나를 고귀한 영적 존재로 만든다.
‘타인에 의한’이 지닌 이런 차원을 레비나스는 ‘내 안에 있는 타자’ ‘동일자 안의 타자,’ 또는 ‘내재 속의 초월’이라 부른다.
타자가 내 안에 ‘혼을 불어넣음’은 타자가 내 몸으로 육화incarnation되어 타인의 고통을 위해 나를 내어줄 수 있도록 노출시킨다.
내 안에 들어온 타자는 내 안에서 타자를 위해 짐을 짊어질 수 있도록 나를 키워낸다.
이것을 레비나스는 ‘모성성maternite'이라 부른다. (p.182-186 부분)
타인을 수단으로 삼고 나의 지배 아래 두고자 하는 욕망은 폭력과 갈등, 전면적인 전쟁의 근원이다.
세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애쓰는 나는 나 자신의 존재 유지에 관심을 둘 뿐 아니라
존재 유지를 실현하기 위하여 타인이 가진 존재 경향과 자유의지를 어떤 방식으로든 제한하고자 노력한다.
모든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구속받지 않는 자유와 독립성, 그리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을 약속할 수 있는 자유와 권력을 될수록 많이 소유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나의 자연적인 자기중심주의는 타인의 자기 중심적 존재 노력과 갈등을 일으킨다.
동일한 세계 속에 거주하는 수많은 ‘나’들이 동시에 모두 세계의 중심일 수 없기 때문에
‘나’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타인을 나의 권력 아래 두거나 제거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므로 홉스가 말한 대로 인간은 타인에 대해 모두 늑대가 되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 발생한다.
고통의 문제:
레비나스는 사람이 고통 없이 진정한 사람이 될 수 없음을 강하게 역설한다.
고통은 주체의 주체성에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주체를 ‘상처받을 가능성’으로, ‘외상에 열려 있음’으로, ‘타자에 대한 노출’로,
타자에 대한 ‘대리자’로, 타자를 위한 ‘볼모’로 서술하는 자리에서 레비나스는 그러한 주체의 모습을 고통 받는 사람으로 그리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주체는 타인에 대해 열려 있고 타인을 위해 고통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고통은 말하자면 주체의 핵심이다.
주체성
레비나스는 주체의 주체성, 즉 주체가 주체로서 자신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조건을 이론적 활동이나
기술적, 실천적 활동에서 찾기보다는 오히려 타인과의 윤리적 관계를 통해서 찾고자 한다.
주체가 주체로서 의미를 갖는 것은 지식 획득이나 기술적 역량에 달린 것이 아니라 타인을 수용하고 손님으로 환대하는 데 있다고 본다.
헐벗은 모습으로, 고통 받는 모습으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의에 짓밟힌 자의 모습으로 타인이 호소할 때
그를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책임지고, 그를 대신해서 짐을 지고,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주체의 주체됨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p.32-33)
레비나스는 그의 후기 철학에서 발전시킨 주체성의 의미, 즉 ‘수동성보다 더 수동적인’ 주체,
타인의 짐을 대신 질 수 있는 책임적 주체를 하이데거의 ‘개방성’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제안한다.
개방성은 상처나 상해에 대해서 아무런 방비 없이 노출된 살갗의 상태를 가리킬 수 있다.
개방성은 노출된 살갗이 상처받을 수 있음을 말한다...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은 한마디로 타인에 의해 사로잡히고, 타인을 위해 고통 받고, 타인을 위해 대신 설 수 있다는 뜻이다.
타인을 위해 고통 받는다는 것은 타인의 짐을 짊어지고, 그를 관용하고, 그의 자리에 선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 타인을 위해 책임질 수 있다는 것,
타인을 대신해서 고통 받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주체성의 ‘의미’라고 레비나스는 강조한다.
무신론과 종교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무신론이 가능한 한 존재를 자신의 발로 설 수 있게 한 것은
창조주에게는 틀림없이 하나의 큰 영광이다”라고 쓰고 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무신론’은 주변 세계와 역사와 존재로부터 스스로 분리해 독립적이 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를 에워싼 어떤 신적인 것, 어떤 신성한 것, 어떤 외적인 힘으로부터 분리해서
자신을 고유한 존재자로 세우는 행위를 일컬어 무신론이라 부른다.
그가 말하는 무신론은 신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으로부터 ‘독립해’ 나온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의 무신론은 하느님의 존재를 긍정하거나 부정하거나 어느 것을 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만일 스스로 자기 발로 서지 못한다면 하느님의 존재를 긍정하거나 부정하거나 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진정한 초월은 자기 자신안으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
자신으로 돌아와 ‘안’이 형성될 수 없다면 ‘밖’의 초월은 가능하지 않다.
신화와 열광주의 앞에서 신을 거부할 수 있는 자만이 참된 하느님을 환영할 수 있다.
무신론, 다시 말해 세속화를 통해 신성한 것으로부터 독립해 스스로 설 수 있는 주체의 출현은
참된 종교, 다시 말해 타자와의 관계가 가능한 조건이다.
따라서 무신론에는 한계와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한다.
무신론은 만일 그 자체에 머문다면 타자와 관계없는 자신의 반항과 고독에 갇힐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반대로 신성한 것에 대한 반항과 그로 인한 홀로 섬이 없이는 참된 신앙, 참된 종교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레비나스에 따르면 ‘종교’는 “전체성을 이루지 않고서 동일자와 타자 사이에 확립된 관계”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가리키는 라틴어가 ‘다시 이어준다re-ligare'란 뜻을 담고 있듯이 종교는 나와 타자를 서로 이어주는 것이다.
무엇이 이어지기 위해서는 이어지는 것들이 제 발로 서야 한다.
더구나 신화에서 정화된 신앙인 유일신론은 이런 의미에서 무신론을 전제로 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계시‘는 일종의 대화인데, 내 바깥에서 오는 계시를 받으려면
대화 상대자가 될 수 있는 독립된 자, 분리된 자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무신론, 다시 말해 신적인 것, 신성한 것으로부터의 독립은 “참된 하느님 그 자체와 참된 관계를 위한 조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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