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에서 대피정 할 때)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찬 공기를 마시며
구불거리는 작은 길을 따라 걷는 일은 큰 즐거움 중에 하나였다.
땅이 생긴 모양대로 이리저리 굽어있고 또 이어져 있는 길을 산책하는 시간은
매일 같은 길을 가면서도 매번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는 때이기도 했다.
가끔 그렇게 혼자 길을 걷다보면 언제나 ‘인생’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그리고 아직은 짧게 느껴지는 내 삶의 여정에서 굽이굽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
혼자 온 것 같으면서도 늘 누군가의 발자국이 함께 있었음을 보게 된다.
특히 어떤 길을 결정해야하는 내 삶의 중요한 고비마다 하느님이 보내주신 특별한 동반자들이 함께 있었고,
그들은 각기 다른 모습을 지녔으나 한결같이 나를 하느님께로 데려다준 세례자 요한과 같은 이들이었다.

[세례자 요한의 손가락]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하느님이 내 곁에 보내주신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었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을 동반하시면서 당신에 관한 진리를 가르쳐주신 예수님께서
실제로 내 삶의 여정에도 함께 하셨음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오랜 기간 젊은이들과 수도자들의 영적 삶을 동반해온 프랑스 성심회의 도미니크 수녀님이 저술한 이 책은
참된 영적 동반의 자세와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영적 지도자’라는 말이 더 많이 통용되고 있지만,
대화를 통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처한 현실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고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 역할은 ‘영적 동반자’라는 표현에서 더 적합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자신의 지식이나 관점을 끌어들이지 않으면서,
동반을 필요로 하는 사람 안에서 움직이시는 성령의 활동을 알아보고
그분의 뜻에 따르기 위해 함께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이 바로 영적 동반자이다.
따라서 이 책은 영적 동반의 사도직을 하고 있는 사목자들을 일차적인 대상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읽다보면 세상과 이웃의 진실한 동반자가 되도록 부르심 받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새롭게 깨우쳐주는 영성을 길어낼 수 있다.
나에게 특별히 도움이 되었던 부분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듣는 태도에 관한 내용이다.
내가 수도복을 입고 있기 때문인지 가끔 지하철 안에서
무작정 자기의 처지를 하소연하거나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처음 그런 사람들을 대했을 때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문제를 무슨 말로 해결해주나?’ 하는 걱정을 은근히 많이 했다.
그렇게 내가 무슨 대답을 할 것인가에 더 집중하다보니 그 사람의 말은 자연히 겉으로 흘려듣게 되고,
나는 형식적인 대답으로 대화를 끝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이 그런 일을 겪을수록 그들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나의 충고나 해결책이 아니라 아무런 판단 없이 들어주는 귀와 열린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마음에 그들이 이야기를 쏟아놓을 수 있는 빈 터를 만들고,
거기서 주님이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시도록 그분을 초대하면
정말 내 힘으로는 줄 수 없는 위로와 희망이 그들에게 가 닿는 것을 보게 된다.
하던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진지하게 그들의 눈을 바라보며 귀를 기울이고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리라는 믿음을 전해주었을 때,
그 자체로 큰 위안을 받고 돌아가는 모습은 나에게도 크나큰 감동으로 남아있다.
동반하는 자세에 있어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나와 함께 걷고 있는 그 사람을
내가 아닌 하느님께로 이끌어주는 것이다.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오로지 예수님만을 가리켰던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가 말이나 삶으로 가리켜야 할 분도 바로 예수님이시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향한 환호나 인기에 매이지 않고, 제자들이 참된 스승을 찾아가도록 준비시켜 주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예수님을 가리키며 그분이야말로 참된 메시아임을 알려주고
그분을 따라가도록 제자들의 길을 열어 주었다.
인터넷과 통신의 결합으로 엄청나게 발전하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세계 안에서
현대인들은 과거보다 더 간절하게 자기 말을 들어줄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어쩌면 최첨단의 문명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만큼 자기 말을 쏟아내는 도구로써만 기술을 사용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더 ‘듣는’ 사도직에로 초대받는다.
또한 모든 가치가 상대화되고 다원화된 현대사회는
마치 예수님께서 “그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라,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다!’,
또는 ‘아니, 여기 계시다!’ 하더라도 믿지 마라”(마태 24,23)고 예고하신 것처럼
서로 다른 곳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난무하고 있다.
많은 손가락들이 돈과 명예. 건강과 인기 같은 세속적인 가치를 가리키며
마치 거기에 구원이 있는 것처럼 소란을 피우는 세상에서 우리는 가끔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한다.
이런 현실이기에 내 이웃의 삶에서 성령의 소리를 듣고,
그들의 손을 이끌어 하느님께 데려다 주는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
그 소명 앞에서 나는 누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 무엇을 향해 손가락을 뻗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되물어본다.
- [야곱의 우물] 2006. 김경희 노엘라 (성바오로딸수도회 수녀) -
'M E D I A > 책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를 사랑하게 하는 자존감 (0) | 2011.02.04 |
---|---|
나를 행복하게 하는 친밀함 (0) | 2011.02.04 |
내 나이 마흔 (안셀름 그륀) (0) | 2011.01.03 |
타인의 얼굴 ('10 성탄) (0) | 2010.12.23 |
철학적 시 읽기: 사유의 의무_아렌트와 김남주 (0) | 2010.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