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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도끼다

기린그린 2014. 4. 13. 22:35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매화는 질 때,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한다. 

매화는 바람에 불려가서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보라가 되어 사라진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목련은 등불 켜듯이 피어난다.(...) 목련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 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서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 박웅현 [책은 도끼다]에서 인용한 김훈의 [자전거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