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72 삶의 의미와 자기서사
우리가 적어도 한 번쯤은 고려해봐야 하는 더 강력한 명제가 있다. "우리 인생의 여기저기 흩어진 조각들을 가지고 서사를 만들거나 발견하는 작업을 하면 우리 삶은 ㄷ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 된다." 회고적 성찰 Retrospection은 유의미한 방식으로 수행될 경우 의미를 발견하고 확인하는 것은 물론이고 의미를 구축하는 수단이 된다.
보편적인 견해에 따르면 우리 삶은 우연한 사건들의 무작위적인 축적처럼 보인다. 그런 무작위적인 삶의 모습은 인간으로서 우리의 가치를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다. 종교 교리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삶의 형상, 그리고 삶의 발전 또는 퇴보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외부 서사를 제공한다. 만약 우리가 종교 서사를 기준으로 의미를 판단하지 않는다면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다. 그 좋은 방법 중 하나가 삶의 무작적인 조각을을 가지고 온전한 서사를 완성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회고적 성찰의 역할은 단지 과거와 직면한다는 것만이 아니다. 회고적 성찰은 선택과 형상화를 통해 원래는 우연만 있던 자리에 예술 작품을 창조하는 일이다. 회고적 성찰을 하는 사람은 과거를 항햐는 감정들 속에서 이중의 혜택을 발견할 수 있다. 과거를 향하는 감정들은 우리 정체성을 발견하는 과정의 일부다. 그리고 그 감정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과거를 재발견하고 그것을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빚어내 인생 서사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가 이 전통적인 모양과 일치할 때에만 그 이야기에 만족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관계를 맺을 때에도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자기 삶을 익숙한 줄거리 형식에 끼워넣으려 마음먹고 있으면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젠더에 기초한 기대들은 우리의 관심을 더욱 왜곡한다. 남성들에게는 영웅적 서사를 요구하고 여성들에게는 사랑과 애착의 서사를 요구하는 것이다. 자기서사 self-narration라는 개념을 전적으로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서사를 변형하고 단순화하는 사회 주류의 기대에 대해 의심해 보지 않고 자기서사라는 과업에 착수하는 것의 위험은 경계해야 한다.
p.201 리어왕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진짜로 통제력을 상실할 준비가 잘된 사람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무력감이 여러 형태로 우리를 습격한다. 어쩌면 타격을 가장 적게 받는 사람들은 진짜로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통제를 중심으로 자기 정체성을 유지해온 사람에게는 무력감이 더 파괴적인 충격과 함께 찾아온다. 그 사람은 과거에 가졌던 정체성의 핵심을 유지할 수가 없다. 다른 정체성과 다른 나아갈 길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p.307 중년 이후의 사랑
이제 가장 교묘한 세 번째 거짓말을 살펴보자. 세 번째 거짓말은 나이 드는 여성의 성생활과 감정에 대해 이런 식으로 표현해야만 관객들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상투적인 줄거리에 따르면 나이 드는 여성은 어리석기 때문에 최악의 선택을 하며,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그 선택을 철회한다. 다시 말해, 그 나이 든 여성은 처벌받아야 한다. 그것도 이중으로. 어리석고 약팍한 관계 속에 던져지는 것이 첫 번째 벌이고, 세월과 운명에 관한 고상한 대사와 함께 그 관계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 두 번째 벌이다. 이는 과거에 소설 속 남성 동성애자들의 연애가 반드시 죽음으로 끝나야 했던 것과 매우 흡사하다.
p.316 로미오와 줄리엣은 모든 사람에게 단점이 있고 인간적 취약성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실의 사랑은 인간적 결함과 취약성을 섬세하게 다루고 존중해야 한다. 나이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 점을 아는 것 같다. 악티움 해전이 안토니우스의 패배로 끝난 직후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가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자신의 사랑을 섬세하게 조율된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녀는 언제 그에게 다가가야 하며, 무슨 말을 해야 하고 무슨 말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예리하게 판단한다.
p.331 보통 영화는 나이듦에 관해, 특히 나이 드는 여성들에 관해 여러 가지 거짓말을 한다. 혹시 이 에세이도 거짓말, 가장 흔하고 가장 악의적일 수도 있는 거짓말에 의존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랑은 한 쌍의 연인에게만 찾아오고, 우리는 한 번에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거짓말. 하지만 실제 우리 삶은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지 않으며 훨씬 다채로운 행복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나이 드는 여자들은 배타적 감정의 한계에 대해 한두 가지쯤 배워놓았어야 한다.
성숙하 사랑은 관능적인 것과 동시에 개인적인 것이다. 그 사랑의 관능적 측면은 기억, 유며, 공통의 내력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사적인 것이다. 바로 그 이유에서 나이든 사람들의 사랑은 젊은이들의 사랑이 가질 수 없는 깊이를 가진다.
p.447 무엇을 남길 것인가 - 가까운 관계 속의 이타성
가까운 관계 속의 이타성이란 사람들을 조종하지 않고, 사람들을 수단으로 이용하지도 않고, 그 사람들의 행복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들의 입장에서 필요한 도움을 주려고 애쓰는 것이다. 물론 꼭 노인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 나이가 들면 왜 이런 유형의 이타성을 발휘하기가 어려워지는 걸까?
우리는 나이가 들어도 계속 친구와 가족들을 필요로 하고 또 그들을 사랑한다. 시간이 더 흐르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비대칭적으로 의존하게 될지는 모른다. 나이 드는 사람들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자기중심적인 공포에 사로잡힌 상태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닐지라도 일상적인 짜증, 경미한 통증, 이동의 어려움, 경쟁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집중하게 된다. 노인들은 화를 잘 내기 때문에 같이 있기가 어려운 사람들일 수도 있다. 또 노인들은 자신이 예전과 다르기 때문에 환영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주체성과 자아가 작아진 느낌을 받는다.
p.449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한다는 의미에서 이타적인 행동은 아주 평범한 것이다. 이타적인 행동을 부르는 특징 또는 습관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첫째, 통제권을 상실하기 한참 전부터 그것에 대비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과 모든 일을 통제하는 데 중독돼 있었던 리어왕의 선례를 따르지 말아야 한다. 자립성은 모든 인간 생활의 특징이며 대개의 경우 유쾌한 특징이다. 자립성을 소중히 여기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은 노년기에 찾아올지 모르는 의존적인 생활에도 대비할 수 있다.
둘째, 나이 드는 사람들은 감정 조절에 신경을 써야 한다. 솔직하다는 것은 귀중한 덕목이지만 솔직함은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 짜증, 불만을 모로리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자기표현에 중독된 우리 문화는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는 중립적이지 않다는 명백한 사실을 잊어버린 듯하다. 감정을 구체적인 말로 표현하면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요구가 된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향한 이타성에는 우리가 느끼는 부정적 감정의 대부분을 자녀들이 겪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도 포함된다. 미국인들은 자신의 모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냉정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깊은 감정이 없고 그런 사람들은 욕구와 갈망과 두려움에 취약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깊은 사랑은 항상 소리 높여 표현하지 않고 애정 표현과 연결되는 요구를 하지도 않는다. 절제는 곧 품격이다.
셋째, 사랑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서보려고 노력하는 일은 다른 시기에도 필요하지만 노년기에는 매우 중요하다. 노년기에는 불안 때문에 사고의 폭이 좁아지고 우리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게 되는 탓에 남의 입장에 서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우리의 자녀와 손자녀들, 그리고 우리보다 젊거나 나이가 많은 벗들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원하는가를 기억하려는 노력은 우리가 날마다 하면 좋은 운동과도 같다.
흔히 하는 미야기로 우리는 잔이 반쯤 비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반쯤 차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노인이든 아니든 간에 자기 주변 모든 것에 대해 불평거리나 못마땅한 점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다. 그런 사람들은 항상 불행하며 남들과 가까워지기 어렵다. 사물의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면 좋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질병, 통증, 툭음의 가능성 등 진짜로 나쁜 일들이 닥치기 때문이다. 그래도 노년기의 좋은 점에 주목하는 것은 우리 자신도 행복해지고 다른 사람들도 행복하게 만드는 훌륭한 방법이다.
p.454 이타적 행동은 언제나 힘든 도전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를 먼저 생각하고, 유아기에는 순전히 자기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만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잘 자라면 다른 사람을 어떤 목적 없이 있는 그대로 사랑할 줄 알게 된다. 아이들이 교육을 정말 잘 받으면서 자랄 경우 그들은 자신과 아주 가까운 가족 및 친구의 범위를 넘어서는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이고, 사회 전반의 대의에 대한 생각도 하면서 일련의 귀중한 책임을 형성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우리 모두 두 번째 아동기에 들어선다. 이 시기에는 자아의 절박한 요구와 육체의 본능적 요구가 그동안 형성했던 좋은 습관들을 방해하고, 우리를 넓은 세상의 가치와 멀어지게 만든다. 우리는 이와 같은 도덕적 위험을 인지하고 있어야 하며, 최선을 다해 그 위험과 맞서 싸워야 한다. 되도록이면 품위와 유머와 겸손을 보여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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