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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녀장의 시대

P9. 사람의 자식 된 자로서 어찌 효도를 하지 않으리오." 할아버지가 근엄하게 해설했고 그것은 가부장의 말이었다. 감히 내 말을 부정하는 것이냐는 질문과도 같았다. 말은 우리를 마치 ~인 듯' 살게 만든다. 언어란 질서이자 권위이기 때문이다. 권위를 잘 믿는 이들은 쉽게 속는 자들이기도 하다. 웬만해선 속지 않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속지 않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방황하게 된다.* 세계를 송두리째로 이상하게 여기고 만다. 어린 슬아는 선택해야 했다. 속을까 말까. 그는 빠르게 속기로 한다. 화선지에 바르게 '아들 자'와 '놈 자'와 '효도 효' 같은 글자를 쓴다. 효녀인 듯 유년기를 보낸다. 어쨌거나 할아버지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P40. 그후로 팔 년이 흘렀다. 집안은 슬아 중심의 가녀장 체제로 제배치..

M E D I A/책방 2023.12.20

당신이 옳다 - 정혜신

p49. 이럴 때 A에게 산소 공급이란 "집에 또 못 들어가고 있구나. 무슨 일이 있었나 보네" 같은 말이다. 이 말은 이 시간에 네가 집 밖을 배 회하고 있다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는 이해다. 네가 이상한 애라서 달밤에 체조하고 있는 게 아닐 거라는 무조건적 믿음과 지지다. 그 말은 A를 절대적으로 안심하게 해준다.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확인이 있어야 사람은 그 다음 발길을 어디로 옮길지 생각할 수 있다. 자기에 대해 안심해야 그 다음에 대해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 네가 그럴 때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말은 '너는 항상 옳다'는 말의 본뜻이다. 그것은 확실한 '내 편 인증이다. 이것이 심리적 생명줄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에게 꼭 필요한 산소 공급이다. p88-89..

M E D I A/책방 2023.12.20

달과 6펜스

8p. 나의 의견으로는, 예술에서 가장 홍미로운 부분은 예술가의 개성이 아닐까 한다. 개성이 특이하다면 나는 천 가지 결점도 기꺼이 다 용서해 주고 싶다. 나는 벨라스케스를 엘 그레코보다 훌륭한 화가로 보지만 그는 너무 인습적이어서 칭찬하려면 맥이 빠진다. 그에 비해 관능적이고 비극적인 저 그리스인은 제 영혼의 비밀을 마치 산 제물을 바치듯 우리에게 바치고 있다. 화가이든 시인이든 음악가이든, 예술가는 숭엄하 고 아름다운 자신의 장식물로써 우리의 심미감을 만족시켜 준다. 하지만 심미감이란 성 본능과 비슷해서 일종의 야만성을 띠게 마련이다. 예술가는 그러한 점에서도 대단한 재능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비밀을 캐다 보면 우리는 탐정 소설에 빠지듯 그 일에 빠지고만다. 그 비밀은 불가해한 우주처럼, 해답을 주지..

M E D I A/책방 2023.12.20

길 - 윤동주

길 윤동주 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게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 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M E D I A/詩 2023.12.01

‘사랑받는 나’로 살아가는 비밀 - 김상운

(22년 2월 20일) 내가 일주일 뒤 한 카페에서 친구가 소개해준 이성과 만나기로 했다고 가정해봅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일주일을 기다립니다. 이번에는 정말 내 마음에 쏙 드는 이성을 만날 수 있을까? 내 인생의 반려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일까? 어떤 모습일까? 이 모든 생각은 어디서 떠오릅니까? 텅 빈 내 마음속에서 떠오릅니다. 일주일 뒤의 현실, 즉 미래의 현실은 내 마음속의 생각으로만 잠재해있습니다. 약속 장소인 카페도, 내가 만날 상대도, 미래의 나도, 내 마음속의 생각으로만 존재합니다.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하루하루 흘러가면서 미래의 현실은 점점 내 눈앞의 현실로 가까이 다가옵니다. 내가 몸을 움직여 미래의 현실을 향해 달려 나가는 걸까요? ..

M E D I A/책방 2023.08.15

영혼의 숨 쉬는 과학

p.324 ‘50년 뒤: 영혼을 죽이다?’ 사후에도 존속해 내세에서 행복 또는 불행하게 된다고 여겨 지는 인간의 정신적 부분. 죽은 사람의 육체를 이탈한 정신, 별개의 실체로서 어떤 형 태와 인격을 부여받는다고 간주된다. 과학이 파괴하게 될 영혼인 영훈-1은 초자연 현상이고, 육체를 벗어나 있고, 뇌가 죽은 뒤에도 존속하고, 뉴런이 흙먼지가 되고 호르몬이 말라도 행복이나 불행을 느낄 수 있다. 과학은 그것을 완전히 죽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영혼-2는 결코 과학에 위협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는커녕 과학은 영혼-2의 쌍둥이이자 하녀다. 역시 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정의는 영 혼-2의 다양한 측면을 설명한다. 지적인 힘 또는 영적인 힘. 지적 능력이 고도로 발달한 상태. 다소 약한 의미로는 깊은 감정, 감..

M E D I A/책방 2023.07.08

자전거 여행 1 - 김훈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 067 숲은 가까워야 한다. 싶은 가까운 숲을 으뜸으로 진다. 노르웨이의 숲이나 로키 산맥의 숲보다도 사람들의 마을 한복판에 들어선 정발 산경기도 고양시 일산동• 내가 사는 풍네의 숲이 더 값지다. 숲은 가깝고 만만하지만, 숲이 사람을 위로할 수 있게 되는 까닭은 그곳이 여전히 문화의 영역이 아니라 자연이기 때문이다. 숲의 시간은 헐겁고 느슨하다. 숲의 시간은 퇴적의 앙금을 남기지 않는다. 숲의 시간은 흐르고 쌓여서 역사를 이루지 않는다. 숲의 시간은 흘러가고 또 흘러오는 소멸과 신생의 순환으로서 새롭고 싱싱하다. 숲의 시간은 언제나 갓 태어난 풋것의 시간이다. 사진작가 강운구가 새로 펴낸 책 [사진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는 오래되어서 새로운 숲의 빛을 보여준다. 일연(1206~1..

M E D I A/책방 2023.07.08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왕이 말했다. 이날만 스무 번째 하는 말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처형이 먼저고, 평결이 나중이야." 여왕이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말도 안 돼! 처형이 먼저라니!" 앨리스가 큰 소리로 외쳤다. "입을 다물어라!" 여왕이 얼굴이 누르락붉으락해졌다. "싫어요!" 앨리스가 말했다. "저 아이의 목을 쳐라!" 여왕이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그러나 움직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당신이 어쩐다고 신경이나 쓸까봐? 당신들은 고작 카드 한 벌일 뿐이야!" 앨리스가 말했다. 바로 이 순간 카드 전체가 공중으로 솟아오르더니 앨리스를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앨리스는 겁이 나기도 하고 화도 나서 조그맣게 비명을 지르며, 쏟아지는 카드들을 쳐내려 했다. 이윽고 앨리스는 강둑에서 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자신을..

M E D I A/책방 2023.07.08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 오스카 와일드

41-도리언은 여전히 자기 초상화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지막이 말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슬픈 일인가요! 나는 점점 늙어갈 테고 끔찍하고 무서운 모습으로 변하겠지요. 그런데 이 그림은 언제까지나 젊은 모습 그대로일 거예요. 오늘이 6월의 어느 한 날만큼도 늙지 않겠지요...... 다른 방식이 있기만 하다면! 언제까지나 젊음을 간직하는 것은 나고, 늙어가는 것이 이 그림이라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모든 것을 줄 거예요. 이 세상을 통틀어 내가 주지 못할 건 하나도 없어요. 할 수만 있다면 내 영혼도 바칠 거예요." 129- 도리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가며 소리쳤다.(시빌에게) “그래, 당신은 내 사랑을 죽였어요. 내 상상력을 흔들어놓곤 하던 당신이 이제는 호기심조차..

M E D I A/책방 2023.07.08

개 - 김훈

아이들이 있는 집에서 살게 되는 것은 개들의 가장 큰 복이다. 내 주인님의 집에는 아이들이 두 명이었다. 큰딸 영희는 초등학교 오학년이었고 막내아들 영수는 이제 두 돌이 되어 온다. 영수는 내가 태어난 마을, 이제는 물 속에 잠겨버린 마을의 할머니댁에 가끔씩 왔던 아기였다. 나는 영수의 몸냄새를 맡고, 사람의 냄새를 처음 알았는데 새 주인집으로 와보니 영수가 이 집 아들이었다. 나는 기뻐서 마당에서 마구 날뛰며 뒹굴었다. 나는 어린 영수가 싼 똥을 먹은 적이 있었다. 나는 똥을 먹은 일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 똥을 먹는다고 해서 똥개가 아니다. 도둑이 던져주는 고기를 먹는 개가 똥개다. 하지만 내가 똥을 자꾸 먹으면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기 때문에 이제는 똥을 먹지는 않는다. 먹고 싶을 때도 참는다. 그..

M E D I A/책방 2023.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