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E D I A/詩 62

슬픈 것은 우리가 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헤어진 방식 때문

슬픈 것은 우리가 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헤어진 방식 때문 류시화 목련꽃 필 때쯤 이따금 혼잣말하네 슬픈 것은 우리가 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헤어진 방식 때문이라고 내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다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만나 다른 방식으로 헤어지는 것이라고 그것만이 옛사랑을 구원할 수 있다고

M E D I A/詩 2022.08.16

저녁기도

저녁기도 류시화 내 기도를 들어주소서 나는 기립근이 약해 잘 무너집니다 나를 붙잡아 주소서 나는 가시뿐 아니라 꽃에도 약합니다 외로움에도 약하고 그리움에도 약합니다 세상 속에 사는 것도 약하고 세상을 등지는 것에도 약합니다 당신이 알다시피 사랑에도 약하고 미움에도 뼈저리에 약합니다 말주변 없는 내 기도를 들어주소서 나는 저항하는 것에도 약하고 받아들이는 것에도 약합니다 축복에도 약하고 저주에도 약합니다 진실에도 거짓에도 약합니다 내 얼굴이 나에게 낯설지 않도록 생의 저녁 나와 함께하소서 내 심장은 혼자서도 이중창을 부릅니다 절망과 희망의, 용기와 두려움의 이부합창을 그러니 많은 해답을 가진 자를 멀리하고 상처 입은 치유자와 걸어가게 하소서 나는 혼자인 것에도 약하고 함께인 것에도 약합니다 손을 내미는 것..

M E D I A/詩 2022.08.16

곁에 둔다

곁에 둔다 류시화 봄이 오니 언 연못 녹았다는 문장보다 언 연못 녹으니 봄이 왔다는 문장을 곁에 둔다 절망으로 데려가는 한나절의 희망보다 희망으로 데려가는 반나절의 절망을 곁에 둔다 물을 마시는 사람보다 파도를 마시는 사람을 걸어온 길을 신발이 말해 주는 사람의 마음을 곁에 둔다 응달에 숨어 겨울을 나는 눈보다 심장에 닿아 흔적 없이 녹는 눈을 곁에 둔다 웃는 근육이 퇴화된 돌보다 그 돌에 부딪쳐 노래하는 어린 강을 곁에 둔다 가정법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보다 가진 게 희망뿐이어서 어디서든 온몸 던지는 씨앗을 곁에 둔다 상처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말보다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곁에 둔다

M E D I A/詩 2022.08.16

눈풀꽃이 나에게 읽어 주는 시

눈풀꽃이 나에게 읽어 주는 시 류시화 너의 걸작은 너 자신 자주 무너졌으나 그 무너짐의 한가운데로부터 무너지지 않는 혼이 솟아났다 무수히 흔들렸으나 그 흔들림의 외재율에서 흔들림 없는 내재율이 생겨났다 다가감에 두려워했으나 그 두려움의 근원에서 두려움 없는 자아가 미소 지었다 너는 봄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다 너 자신이 봄이다 너 자신이 너의 걸작

M E D I A/詩 2022.08.16

원 - 류시화

원 류시화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둘레에 보이지 않는 원을 그려 가지고 있다 자신만 겨우 들어가는 새둥지 크기의 원을 그린 이도 있고 대양을 품을 만큼 혹등고래의 거대한 원을 그린 이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만 들어올 동심원을 그린 이도 있다 다른 원과 만나 어떤 원은 더 커지고 어떤 원은 더 작아진다 부서져서 열리는 원이 있고 부딪쳐서 더 단단해지는 원이 있다 나이와 함께 산처럼 넓어지는 원이 있고 오월붓꽃 하나 들여놓을 데 없이 옹색해지는 원이 있다 어떤 원은 몽유병자의 혼잣말처럼 감정으로 가득하고 어떤 원은 달에 비친 이마처럼 환하다 영원히 궤도에 붙잡힌 혜성처럼 감옥인 원도 있고 별똥별처럼 자신을 태우며 해방에 이르는 원도 있다 원을 그리는 순간 그 원은 이미 작은 것 저마다 자기 둘레에 원 하나씩 그..

M E D I A/詩 2022.08.16

너는 피었다 - 류시화

너는 피었다 류시화 봄맞이꽃, 너는 피었다. 언제 피어야 하는지 대지에게 묻지 않았다 너를 창조한 이의 수신호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피어나기에 최적의 장소인지 피는 것 도와줄 이가 있는지 살피지 않았다 눈 다 녹았는지 비소식 언제 잡혀 있는지 자꾸만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야생동물 발자국 옆에서 그냥 피었다 어느 만큼 높이 자라야 흔들리지 않는지 속눈썹이 길어야만 하는지 어느 쪽으로 얼굴 향해야 하는지 오래 계산하지 않았다 지상에서의 삶이 얼마나 길 것인지 다른 꽃들의 조언을 구하지도 않았다 지난번 생이 얼마나 가파른 생이었나 얼마나 고된 노동이었나 입술 깨물며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봄 사용법 배우지 않았다 너는 꽃이면서 너 자신의 유일한 지지대 날개이면서 그 날개 밀어 올리는 바람 너는 피었다 그냥..

M E D I A/詩 2022.08.16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 류시화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류시화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이다 모든 꽃나무는 홀로 봄앓이하는 겨울 봉오리를 열어 자신의 봄이 되려고 하는 너의 전 생애는 안으로 꽃 피려는 노력과 바깥으로 꽃 피려는 노력 두 가지일 것이니 꽃이 필 때 그 꽃을 맨 먼저 보는 이는 꽃나무 자신 꽃샘추위에 시달린다면 너는 곧 꽃 필 것이다

M E D I A/詩 2022.08.16

그런 사람 - 류시화

그런 사람 류시화 봄이면 꽃마다 찾아가 칭찬해 주는 사람 남모르는 상처 입어도 어투에 가시가 박혀 있지 않은 사람 숨결과 웃음이 잇닿아 있는 사람 자신이 아픔이면서 그 아픔의 치료제임을 아는 사람 이따금 방문하는 슬픔 맞아들이되 기쁨의 촉수 부러뜨리지 않는 사람 한때 부서져서 온전해질 수 있게 된 사람 사탕수수처럼 심이 거칠어도 존재 어느 층에 단맛을 간직한 사람 좋아하는 것 더 오래 좋아하기 위해 거리를 둘 줄 아는 사람 어느 길을 가든 자신 안으로도 길을 내는 사람 누구에게나 자기 영혼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 내어 주는 사람 아직 그래 본 적 없지만 새알을 품을 수 있는 사람 하나의 얼굴 찾아서 지상에 많은 발자국 낸 사람 세상이 요구하는 삶이 자신에게 너무 작다는 걸 아는 사람 어디에 있든 자신 안의..

M E D I A/詩 2022.08.16

기쁨을 수호하라 - 마리오 베네데티

우루과이 국민 시인 마리오 베네데티의 시 전쟁터의 참호처럼 기쁨을 수호하라. 충격적인 소문과 단조로운 일상으로부터 괴로움과 비참함으로부터 일시적인 없음으로부터 그리고 바꿀 수 없는 것들로부터 하나의 원칙으로서 기쁨을 보호하라. 놀라운 일들과 악몽으로부터 무관심과 사소한 것들로부터 달콤한 죄로부터 심각한 진단으로부터 하나의 깃발처럼 기쁨을 방어하라. 눈멀게 하는 빛과 우울함으로부터 너무 순진한 사람과 악당으로부터 공허한 미사여구와 아픈 심장으로부터 속 좁은 생각과 학문적인 편견으로부터 운명처럼 기쁨을 보호하라. 불과 그 불을 꺼 주겠다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해치는 일과 타인을 해하는 일로부터 게으름과 의무의 부담으로부터 행복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부터 하나의 확신으로서 기쁨을 지키라. 값나가는 것과 무가치한..

M E D I A/詩 2020.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