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E D I A/책방

랩걸

기린그린 2025. 1. 29.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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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6.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어릴 적을 생각하면 기억 나는 나무가 하나 있다. 모질고 긴 겨울 내내 도전적인 초록색을 자랑하며 우뚝 서 있던 푸른 빛이 도는 은청가문비다. 그 나무의 바늘 같은 잎들은 하얀 눈과 잿빛 하늘에 화가 나기라도 한 듯 날카로웠다. 내 속에서 키워가던 금욕주의적 성향 의 롤모델로도 완벽했다. 여름에는 그 나무를 껴안고, 오르고, 이야기를 나누며, 그 나무가 나를 잘 알고, 그 아래 있으면 내가 투명인간이라는 상상을 했다. 개미들이 시든 나뭇잎을 들고 왔 다 갔다 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들이 곤충들 지옥에 빠지는 저주 를 받은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그 나무가 사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물과 공기 로 자신이 필요한 음식을 만드는 존재라는 것을 배웠다. 내가 나 무를 오른다 해도 나무가 눈치 채지 못할 만큼의, 고작해야 작 은 미동밖에 되지 않을 것이며 요새를 만들기 위해 가지를 잡아 당긴다 해도 나무에게는 머리에서 머리카락을 하나 뽑는 정도 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럼에도 그후로도 몇 년 동안 나는 매일 밤 그 나무에서 3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작 은 유리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대학에 진학했고, 고향과 어린 시절을 남겨두고 기나긴 여정을 떠났다.
그후 나는 그 나무도 어린이였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 았다. 커서 내 나무가 될 배아는 땅에서 몇 년을 숨어 지냈을 것 이다. 너무 오래 기다려도 위험하고 씨앗 바깥으로 너무 빨리 나와도 위험했다. 아주 작은 실수만 저질러도 제일 강한 이파리조 차 며칠 사이에 썩혀버릴 수 있는, 잘못을 허락하지 않는 바깥 세상의 소용돌이에 단번에 휩쓸려 들어가 죽음을 면치 못할 것 이기 때문이다. 나무는 미래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처음 10년 은 엄청난 성장을 거듭했을 것이다. 10세에서 20세 사이에 나무 는 크기가 두 배로 자랐지만 그런 키에 따라오는 도전과 책임에 는 그다지 잘 준비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 또래와의 경쟁에서 뒤 쳐지지 않으려고 애썼을 것이며 가끔은 대담하게 햇빛이 가득 드는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을 것이다. 자라는 데에만 완전히 집 중하는 이 시기에는 열매를 맺지는 못하지만 거기 필요한 호르 몬의 분비가 시작된다. 다른 십 대들과 마찬가지로 내 나무도 그 해를 그렇게 보냈다. 봄에는 엄청나게 키가 크고, 여름에는 새로 운 잎을 만들고, 가을에는 뿌리를 뻗고, 내키지 않지만 따분한 겨울의 느린 리듬에 자신을 맞췄을 것이다.
십 대의 관점에서 볼 때 어른 나무들은 바보 같으면서도 무 한한 미래를 의미했다. 50년, 80년, 어쩌면 100년을 쓰러지지 않 기 위해 애를 쓰는 존재, 날마다 아침이 되면 전날 떨어진 바늘 잎을 대신할 새잎을 만들고, 밤에는 효소 분비를 중지하는 것으 로 일과를 끝내는 존재. 땅 밑 새로운 영역을 정복한 후 갑작스 레 영양소가 쏟아져 들어오는 일은 이제 더이상 없고, 지난겨울 에 새로 난 틈으로 믿음직하고 오래된 곧은 뿌리가 살짝 세력을 늘리는 일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어른 나무는 매년 허리가 조금 더 두꺼워지는 것 말고는 수십 년이 흐르도록 별다른 변화가 없 다. 가지에는 어렵사리 얻은 영양소가 늘 배고픈 젊은 세대의 코 앞에 자린고비의 굴비처럼 걸려 있다. 물이 풍부하고, 토양이 깊고 풍요로운 곳,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요소인 햇빛 가득한 좋은 동네에 사는 나무들은 다고난 장재력을 백분 발휘한다. 그 조적으로 조건이 나는 동네에 사는 나무들은 좋은 동네 나무를 보다 키는 반도 못 크고, 쑥쑥 크는 십 대 시절도 없이 생명을 부 지하는 데 집중하면서 운이 좋은 나무들이 자라는 속도의 절반
도 안 되는 속도로 자란다.
내 나무는 팔십 몇 년을 살아오면서 아마도 몇 번 아팠을 것 이다. 나무를 은신처와 식량 공급원으로 이용하려고 공격을 멈 추지 않는 동물과 곤충 들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도망갈 수 없 으니 나무는 뾰족한 가시와 독이 있고 먹을 수 없는 나무 진으로 무장해서 그들의 공격을 예방한다. 가장 위험한 것은 썩어가는 식물 조직에 갈 데 없이 덮여서 취약한 상태로 있어야 하는 뿌리 다. 방어 장치를 유지하는 비용은 내 나무가 더 희망찬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모아놓았던 저금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진액 한 방울을 흘릴 때마다 씨앗 하나가 열리지 못하고, 가시 하나를 만들 때마다 이파리 하나를 만들지 못한다.
2013년에 내 나무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겨울이 다지 나갔다고 추측한 내 나무는 가지를 뻗고 여름에 대비해서 새 바 늘잎들을 무성하게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해 5월은 예년에 비해 너무도 추웠고 때아닌 봄 눈보라가 몰아닥친 후 어느 주말에 엄 청난 폭설이 쏟아졌다. 침엽수는 많은 양의 눈을 감당할 수 있지 만 새로 난 이파리의 무게까지 더해진 상태로는 무리였다. 처음 에는 휘기만 했던 가지들이 결국 부러져버리면서 키 크고 헐벗은 본체만 남았다. 부모님은 내 나무를 베고 뿌리를 뽑아 안락사 를 시켰다. 몇 달이 지난 후 전화로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눈부신 햇빛을 받고 서 있었다. 내가 사는 곳은 1년 내내 눈이 오지 않는, 집에서 6,400킬로미터도 넘게 떨어진 곳이었다. 나는 나무 가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자마자 부고를 듣 게 된 아이러니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이야기는 아이러니 이 상이었다. 내 은청가문비는 생존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내 나무 는 삶을 살고 있었다. 내 삶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나무의 삶이 거치는 중요한 고비를 모두 넘겼고, 최고의 시간을 누렸고, 시간 에 따라 변화했다.
시간은 나, 내 나무에 대한 나의 눈, 그리고 내 나무가 자신 을 보는 눈에 대한 나의 눈을 변화시켰다. 과학은 나에게 모든 것이 처음 추측하는 것보다 복잡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을 발견 하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레 시피라는 것을 가르쳐줬다. 과학은 또 한때 벌어졌거나 존재했 지만 이제 존재하지 않는 모든 중요한 것을 주의 깊게 적어두는 것이야말로 망각에 대한 유일한 방어라는 것도 가르쳐줬다. 나 보다 더 오래 살았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내 나무도 그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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