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491호에서 독자리뷰에 실린 ozzy님의 글이
내가 본 느낌과 거의 일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여기에 옮겨본다.
그 때 그 영웅놀이 - <그때 그 사람들>의 미숙한 역사해석을 비판한다.
<그때 그 사람들> 1979년 10월 26일 하루를 생동감있게 재구성하고 있을 뿐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한 위로의 시선도 혹은 '그때 그 옆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태도도
의도적으로 부정하는 작품이다.
단지 임상수 감독은 그 모든 이해관계의 머리꼭대기 위에 올라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너희들 그때 정말 웃겼어'라는 식의 조소를 흘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그때 그 시절을 공평하게 희화화하는 것도 아니다....
세트촬영의 묘미를 최대한 살리며 시시각각 인물들의 머리 위로 떠올라 조망하는
감독의 시선은 10.26이라는 사건을 그저 '비웃기만' 한다.
블랙코미디라는 애초의 장르설정은 탁월했으나,
실제 영화의 외피는 문법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정작 영화 어디에서도 인물들의 이중성을 드러낼 만한 유머감각은 찾아볼 수가 없다.
단지 행동패턴을 희화화해 얻어내는 단발성 웃음이 전부이다.
가장 가공할 만한 부분은 구금된 김재규를 바라보며 전두환이 '또라이' 운운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 하나가 <그때 그 사람들>의 무책임함을 대변하고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은 감독에게 합당한 방법으로 평가받지도, 그렇다고 비판받지도 못한채
상식 밖의 행동만을 일삼다가 쓸쓸하게 퇴장한다.
그리고 윤여정의 내레이션이 그들을 일컬어 '바보'라고 조롱한다.
현상은 없는데 결과만이 있는 셈이다.
만약 이 작품에 이의를 제기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김재규쪽이다.
....
도대체 '그때 그사람들'에 대한 감독의 입장과 태도는 무엇인가.
영화 속에서 그것을 도출할 만한 어떠한 근거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전적으로 감독의 실수(?)다.
<그때 그 사람들>은 가슴을 진동할 풍자는 고사하고, 오히려 그때를 살아간,
혹은 그 시절을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한 무더기의 비관만을 안겨줄 뿐이다.
전지적인 시점에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조롱만이 유지되는 영화를 보며
관객은 세상과 역사를 모르는 바보가 된다.
더군다나 그 조롱이 겨우 인물들의 대사나 행동을 통해 약점이나 잡는 식이라면 곤란하다.
배우들의 가열찬 호연만으로 모든 것을 덮어주기에는 때가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역사에 대한 시각과 태도를 요구하는 것은 이분법적 사고의 연장성 위에서
이편과 저편을 가르고 해석하려는 악의와는 당연히 구별되어야 한다.
이 60억짜리 영화가 임상수에 의해 새롭게 재구성되고
장르적으로 직조된 '픽션'이기를 바랐지만 .....
결국 이 영화는 문법적 완성도와 정치사회적 해석 중에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채로 주저앉아버린다.
<그때 그 사람들>은 재미없는 영화가 아닌 것만큼은 확실하다.
하지만 역사의 망령을 환기시키는 수고를 마다지 않으면서
여론몰이에 성공한 작품에 관객이 거는 소망과 기대는 각별하다.
<그때 그 사람들>은 그 욕망을 채워주지, 아니 채워줄 수가 없다.
단지 그때 그 사람들의 하루를 수컷들의 시대착오적인 영웅놀이로 비웃고 끝내기에는,
바로 세워진 과거를 통해 현실의 갈등과 부조리를 치유하려는 이들의 희망이
비교할 수 없이 크고 높은 까닭이다.
<그때 그 사람들>의 미숙함은 단지 이 영화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비극인 것이다.
나는 정말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대단한 실망감만 안고 왔다.
두툼한 우리나라 역사책을 긴 시간동안 읽고 나서,
그동안 내 나라에 대한 뿌리도 제대로 모르고 살아왔던 것을 반성하며
다시금 역사에 대한 눈을 뜨고 애정을 품기 시작한 시점에서
이 영화는 그야말로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임상수 감독의 스타일을 쿨~ 하다고 하고, 이 영화 또한 쿨~하다고 하지만
나는 섬짓한 냉랭함만을 느꼈을 뿐이다.
역사에 대한 애정도 없고, 제대로된 비판도 하지 않을거라면 이 영화를 왜 만들었는지....
솔직히 오랫동안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
나는 이 영화에 한 가지 기대만을 걸었었는데,
그것은 우리나라의 비극적 역사에 관한 감독의 냉철한 시선과 공정한 인간관이었다.
내 욕심이 너무 지나친 것이었을까?
아무리 영화 만드는 솜씨가 좋아도 감독의 인간관이 냉소적이기만 하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 모두를 비웃는 것이 된다.
한 가지, 더 괘씸한 것은 감독이 취하는 여성들에 대한 표현방식이다.
여기에 나오는 여성들은 애완견 정도의 수준만큼만 감안(?)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