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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정원 - 황석영

기린그린 2013. 7. 19. 21:24

 

하지만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사랑하는 이들의 일상은 언제나 새로운 출발이었다. 

태어남이라던가 만남이라던가 싫증이라던가 넌더리라든가 이해라든가 죽음이라든가 미움과 노여움과 그리움이나 시시함, 

그런 모든 것이 긴 장마철에 한무리씩 다가오던 끝없는 구름의 행렬처럼 차례로 스쳐 지나왔다.

기록영화에서 보았듯이꽃봉오리가 움트고 꽃잎이 나오고 피어나고 활짝 피어나고 

더 활짝 피어나 젖혀지면서 끝에서부터 시들어 움추러들고 

드디어는 차례로 말라 떨어져 가지 끝에 간신히 붙은 꽃잎 하나 흐느적이다가 슬로우 모션으로 나부껴 떨어지는 광경, 

그리고 필름은 거꾸로 돌아가며 다시 환원된다.

이 모든 출발은 매순간 새로 시작되는 것 같다. 

는 때때로 세기말의 그림들처럼 불안하다. 

이별 또한 새로운 출발이 될테니까. 

어쩌면 그는 내게서 자기를 빼앗아갈지도 모른다. - p.210

 

그래요, 사는 일에는 에누리가 없지요. 

이제 와 생각해보면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든 끌어안고 겪는 이에게만 꼭 그만큼 

삶은 자기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차례 차례로 내놓거든요.

참으로 지당한 말씀. - 상 p.298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은결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마음고생으로 시달리는 한이 있더라도 얼마나 풍요했을 것인가. 
마음이 물결처럼 파동치는 날을 두려워할 게 아니다. 원래 사는 일이 그렇지 않았던가. 
(하) 115

그런데 우리가 함께 법석대며 정성을 쏟아 만들어놓은 눈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한낮의 햇볕에 녹아내리고 난 뒤 최초의 형상은 사라지고 우리가 붙여둔 숯덩이며 눈이며 고추를 꽂은 붉은 코도 다 떨어지고 씌웠던 모자는 바람에 날려갔어요. 그리고 얹어놓았던 머리는 몸통 위로 녹아내려 작은 눈더미가 되어 누렇게 흙과 먼지로 더럽혀져 있어요. 아이들의 대깔거리던 웃음은 사라지고 바퀴와 발길에 진창이 되어버린 일상이 무심하게 거리에 남아 있겠지요. 하- 218

열정이 도대체 무슨 독감 따위인지 이제는 기억조차 없지만, 
바람부는 날 어느 언덕 위에서 오리나무 같은 데 기대어 서면 좋잖아요. 
작별할 때 한맺힌 핏물도 내게 덮어씌우지 않고 조용히 한걸음 물러서는 그림자같이요. 
아버지의 감 이야기에 나오는 색시처럼 내색 않고 같은 선에 서서 
넉넉한 시선으로 한 방향을 바라보아주는 아낙이 되고 싶었지요. 
그렇지만 헤어지진 말고 오래 같이 살 수 있으면 좋았을 것을. 하-249


당신도 이제는 나이가 많이 들었겠지요.

우리가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어왔던 가치들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직도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고 있어요.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또 한번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요.

혹시 바위틈 사이로 뚫린 길을 걸어들어가 갑자기 환하고 찬란한 햇빛 가운데 색색가지의 꽃이 만발한 세상을 본건 아닌가요?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나요? 하-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