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서의 삶, 그리고 주역
P17. 미국의 정신의학자 밀턴 H. 밀러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 속에 있다"라고 말했다. 나 역시 그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이 세상에 자기만의 서사를 갖지 않은 사람은 없다.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한 논문에서 "지구상의 서사는 무한하다"라고 썼는데, 난 그 말에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는
"서사는 모든 시간, 모든 장소, 모든 사회에 극히 무수한 형식으 로 존재한다. 모든 인간 계급, 모든 인간 집단은 고유의 서사를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상반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다 함께 그 서사를 즐긴다. 이때 범세계적이고 범역사적이며 범문화적인 서사는 곧 삶이다"라고도 했다.
서양의 역사에서 그가 말하는 서사의 근간은 기독교 사상의 뿌리인 헤브라이즘과 그리스 문명에 기초하고 있는 헬레니즘으로 나뉜다. 그 두 거대한 뿌리의 근원은 물론 성경과 그리스 로마 신화이다. 그 속에 담긴 광대한 이야기와 그 이야기에 깃든 온갖 상징과 비유들은 가지를 뻗어나가면서 서양의 문화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문학, 예술, 철학, 심리학, 인류학, 역사와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분야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카를 융이 말하는 하나의 '원형'으로서 인류의 집단 무의식에 깊숙이 스며들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우리가 성경과 그리스 로마 신화를 모르고서는 서양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P59. 그런데 왜 모든 것이 이루어진 기제와 영원히 풀리지 않는다는 미제가 한 쌍일까? 사실 우리의 삶은 어떤 의미에서는 기제와 미제의 연속이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를 마치고(기제) 나면 중학교에 진학해서 새로운 삶이 시작(미제)된다. 임산부에게 출산은 지난 10개월간의 완성이니 기제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새 생명을 키워내야 하니 미제이다. 더욱이 태어난 아이가 어떻게 성장할지 모르니 더더욱 미제일 수밖에 없다. 학창 시절을 끝내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것도 결국은 기제와 미제의 반복이다. 모든 것이 끝나고 완성된 것 같을 때 새로운 변화가 시 작되고 그동안 숨어 있던 문제들이 나타나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P77. 《주역》에서 때와 기다림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은 수괘품화이다. 이 괘는 물을 상징하는 감화와 하늘을 상징하는 건과분화로 이루어져 있어서 수천수화이다. 수는 기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괘에서 주는 전반적인 조언은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때를 기다리며 자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구의 효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들에서 기다린다. 변함없는 마음을 가지고서 대처하면 이롭고 허물이 없다."
들에서 기다린다는 것은 아직 자신의 때에서 멀리 떨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항상심이다. 늘 변함 없고 평정된 마음으로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주역》은 '때'의 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P81. 《주역》에서 '변'이란 음이 왕성한, 즉 음이 극성한 가운데서 양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화'란 양이 극성한 가운 데서 음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린 잘나갈 때는 스스로 바뀌려고 하지 않고, 그 상태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러다가 밑바닥까지 떨어지면 그때 비로소 절실히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이 '변'이다.
반면 움직여 나가서 무언가를 이루는 것, 그것이 화(化)이다. 음에서 나아가 완전히 양이 된 순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변하긴 했으나 이룬 것은 없다. 이루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 떨치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면서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자세. 이것이 《주역〉 에서 의미하는 변화이다. 즉, 세상의 모든 것들이 변화하므로 거기에 대처하는 법을 알라는 것이 《주역》의 가르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내가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 언제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분별하는 일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자신의 능력에 자신이 있더라도 때가 아니면 함부로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반면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고 더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는 자신의 능력을 내보일 수도 있어야 한다. 즉, 자신의 힘이 충분히 성장했는지 시험해봐도 괜찮다는 판단이 들 때는 과감하게 행동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데 우린 자신이 조금만 잘나간다는 생각이 들면 그만 내 처지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앞서 언급한 임원이 그런 경우이겠다.
P122. 몽테뉴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의 영혼에는 다양한 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면 이렇다.
약간 돌려 보거나 조금만 다르게 봐도 온갖 모순이 내게서 발견된다. 수줍고 건방지고, 정숙하고 음탕하고, 수다스럽고 뚱하고, 통크고 까다롭고, 영리하고 둔하고, 시무룩하고 상냥하고, 거짓되고 진실하고, 유식하고 무식하고, 기분파인 데다가 인색하고 허랑방탕하고. 나는 내가 이 모든 것을 얼마간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P 138. 겸손한 자는 높아지면 빛이 나고 낮아지더라도 그를 넘어갈 수 없 다. 군자라야 끝을 마칠 수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겸손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나 오는 원문 중에서 '겸존이광'이라는 구절은 옛사람들 이 편액을 만들어 걸어두기 좋아하는 문장 중 하나였다고 한다.
겸는 《주역》 64괘 중에서 전체 효사가 "길하고 좋다"라고 끝나는 유일한 패이기도 하다. 겸허함을 잃지 않으면 어떤 경우에도 형통하고 상서로울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다만 여기서도 과유불급의 폐단에 대해서는 경계하고 있다.
육사의 효사에 "겸허한 사람이라는 허명을 물리치라"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겸허함이 지나쳐서도 안 되므로 정도를 지키라는 주문으로 해석한다.
허명에 대해서는 맹자도 말했다. 《맹자》 〈이루장구〉 하편에 보면 서자가 공자께서 물을 칭찬했는데, 무엇 때문이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맹자의 대답은 이러했다.
근원이 있는 샘물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졸졸 흘러 구덩이를 채운 뒤에 앞으로 나아가 바다에 이른다.
근본이 있는 것은 이와 같으 니 이를 취하신 것이다. 진실로 근본이 없다면 칠팔월 사이에 빗물이 모여 크고 작은 도랑을 모두 채우나 그 물이 말라버리는 것 을 서서 기다릴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명성이 실제보다 지나친 것을 군자는 수치로 여긴다.
겸허한 사람이라는 것을 포함해 모든 허명은 '가득 찼다 싶은 순간에 어느새 말라버리는 한여름 빗물' 같은 것에 불과하다 나, 이 얼마나 멋진 비유인가!
P211. 물론 쉬운 이야기는 아니다. 분노와 같은 감정 폭발은 대개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거의 습관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측면이 있다. 몽테뉴의 표현을 빌리자면 "분노란 저 혼자 장구 치고 북 치며 부풀어 오르는 정념'이다.
결국 그런 행동은 스스로를 멸시하는 것일 뿐 아니라 상대방의 멸시를 부르는 법이다. 그리하여 인간관계 역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나는 그것을 대단히 단호하게 표현해 놓은 놀라운 문장을 《맹자》에서 발견했다. <이루장구> 상편에 나오는 말씀이다.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멸시한 뒤에 남이 멸시한다."
폴 오스터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일단 자기에 대해 반감을 품게 되면 다른 사람 모두가 자기에게 반감을 품고 있다고 믿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고.
P216. 믿음을 가지고 도와야 허물이 없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신뢰이 다. '이 사람이 날 왜 도와주지?' 하는 불신을 품게 되면 상대방 의 의도에 대해 살피게 되는 것이 사람 심리이다. 그러면 내 편 에서 진심으로 도와주려고 해도 그 마음이 상대에게 잘 가닿지 않을 수 있다.
반대로 내 편에서 생색을 내서도 안 된다. 상대방의 필요가 아닌 내 본위에 따르는 도움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경우 거의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의 감사와 헌신을 요구하면서 지배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시도가 배후에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대방이 주 지 않으면 더 크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인다.
맹자 역시 그런 일들을 경계하라고 하면서, 남을 책망하기보 다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고 조언한다. 다음은 《맹자》 <이루장구> 상편에 나오는 말씀이다.
남을 사랑하는데 친해지지 않으면 나의 인자함을 돌아보고, 남을 다스리는데 다스려지지 않으면 나의 지혜를 돌아보고, 남을 예우하는데 답례가 없으면 나의 공경하는 태도를 돌이켜봐야 한다
그의 말씀이 인간관계에서 신뢰를 회복하는 지름길임은 말 할 나위도 없다.
부부 관계이든, 부모 자녀 관계이든, 사회적인 관계이든 신뢰가 없으면 오래갈 수 없다. 예를 들어, 자녀가 부모의 사랑을 의심하게 되면, 즉 부모가 단지 욕심과 체면 때문에 자신에게 '척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어떨까? 이 경우 아이들은 오히려 부모의 바람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수동공격성의 심리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와 믿음의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돕는다면 그것은 제대로 돕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행동은 효율적이어야 한다. 불필요한 일로 인생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특히 누구를 돕고 따를 때는 과연 상대방이 그럴 만한 그릇인지를 살피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기꺼이 도와주고, 도움을 받지 않으려는 사람은 억지로 도와주지 말아야 한다. 한편 아랫사람의 경우 충성을 다해 윗사람을 도울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해서 보상을 기대하며 억지로 헛되게 자신을 굽히거나 권모술 수를 쓸 필요는 없다. 내가 크게 쓰이고 안 쓰이고는 상대의 선택에 달려 있다.
결론적으로 비괘는 인간관계에서 도움의 도를 강조한 것이다. 사람을 도울 때는 서로 믿음을 가져야 하고 자기 정체성이 분명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게 서로 돕고 친애할 때 이윽고 화합과 평안의 자리가 마련되는 것이다.
P245.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때로 홀로 있으면서 자기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시간이 없으면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건 소크라테스 시대부터 변함없이 내려오는 전통이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어느 인물이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도 전혀 나아진 게 없더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자 "그 사람, 자기를 지고 갔다 온 모양이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것이 우리의, 아니 나의 현실이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나 자신조차 내려놓고 거리낄 그 무엇도 없이 홀로 먼 길을 떠나는 방랑자를 꿈꾼다. 실제로 그 모습은 고독과 관련해 나에게 늘 떠오르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P335. '준'이란 사나운 새이고 '궁시'란 도구이다. 그것을 쏘는 것은 사람이다. 군자가 도구를 갖추고 있다가 때를 기다려 행동하므로 이롭지 않을 수 없다. 일단 행동하면 확실하게 하니 활을 쏘아 맞힌다. 이는 도구를 갖춘 후에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공자의 말씀 중에서 핵심은 군자는 '도구를 갖추고 있다가 때를 기다려 행동한다'라는 것이다. 공자는 리더십에 필수적인 요소를 언급하고 있다. 즉, 리더는 자신만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사나운 새가 있고 그것을 쏘아 맞힐 화살도 있고 그 화살을 쏠 사람도 있으나 그 모든 것을 제대로 이루어 내도록 지휘하는 리더가 무능하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따라서 리더는 자기만의 계획과 문제해결 능력을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한다. 다만 그것을 섣부르게 드러내는 일은 삼가야 한다.
그 대신 때를 기다렸다가 단번에 기회를 잡을 수 있어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그런 점에서 해괘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헤르메스에 비유된다는 것이다. 헤르메스는 유동성, 움직임, 새로운 시작 등을 상징한다. 그는 경쾌한 여행가, 유창한 언변으로 상대를 휘어잡는 책사이자 해결사의 이미지로도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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