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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걸

랩걸P46.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어릴 적을 생각하면 기억 나는 나무가 하나 있다. 모질고 긴 겨울 내내 도전적인 초록색을 자랑하며 우뚝 서 있던 푸른 빛이 도는 은청가문비다. 그 나무의 바늘 같은 잎들은 하얀 눈과 잿빛 하늘에 화가 나기라도 한 듯 날카로웠다. 내 속에서 키워가던 금욕주의적 성향 의 롤모델로도 완벽했다. 여름에는 그 나무를 껴안고, 오르고, 이야기를 나누며, 그 나무가 나를 잘 알고, 그 아래 있으면 내가 투명인간이라는 상상을 했다. 개미들이 시든 나뭇잎을 들고 왔 다 갔다 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들이 곤충들 지옥에 빠지는 저주 를 받은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그 나무가 사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물과 공기 로 자신이 필요한 음식을..

M E D I A/책방 2025.01.29

해변의 카프카

해변의 카프카P17. 어떤 경우에는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진로를 바꿔가는 국 지적인 모래폭풍과 비슷하지. 너는 그 폭풍을 피하려고 도망치는 방향 을 바꾼다. 그러면 폭풍도 네 도주로에 맞추듯 방향을 바꾸지. 너는 다 시 또 모래폭풍을 피하려고 네 도주로의 방향을 바꾸어버린다. 그러면 폭풍도 다시 네가 도망치는 방향으로 또 방향을 바꾸어버리지. 몇 번 이고 몇 번이고, 마치 날이 새기 전에 죽음의 신과 얼싸안고 불길한 춤 을 추듯 그런 일이 되풀이되는 거야. 왜냐하면 그 폭풍은 어딘가 먼 곳 에서 찾아온, 너와 아무 관계가 없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그 폭 풍은 그러니까 너 자신인 거야. 네 안에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면 돼.그러니까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모든 걸 체념하고 그 폭풍..

M E D I A/책방 2025.01.29

나를 향해 걷는 열 걸음 - 최진석

P20. 1돈키호테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자신을 섬기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모험을 하려면 자신의 습관과 주위의 시선을 이 겨내야 합니다. 돈키호테를 보세요. 책을 읽기 위해 좋아하는 사냥을 끊었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팔아 책을 샀지요. 그는 보통 모험가가 아닙니다. 책에 미친 모험가예요. 이 정도로 결행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어정쩡해집니다. 우리는 그가 막무가내 모험가가 아닌 굉장히 지적인 모험가라는 걸 알아야 해요. 그에 게는 그를 지배하는 이론 같은 강력한 체계가 없었습니다. 돈키 호테는 책을 통해 체계를 넘어선 사람이에요. 미쳤기 때문에 다 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지요.산초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왕을 제거하지도 왕을 세우지 도 않습니다요..

M E D I A/책방 2025.01.20

연필로 쓰기 - 김훈

연필은 내 밥벌이의 도구다.글자는 나의 실핏줄이다.연필을 쥐고 글을 쓸 때 나는 내 연필이 구석기 사내의 주먹도끼, 대장장이의 망치, 뱃사공의 노를 닮기를 바란다.지우개 가루가 책상 위에 눈처럼 쌓이면 내 하루는 다 지나갔다.밤에는 글을 쓰지 말자.밤에는 밤을 맞자.연필은 나의 삽이다. 지우개는 나의 망설임이다. 연필은 짧아지고 가루는 쌓인다

M E D I A/책방 2025.01.19

행복에게 - 이해인

행복에게 이해인어디엘 가면 그대를 만날까요누구를 만나면 그대를 보여줄까요내내 궁리하다제가 찾기로 했습니다.하루하루 살면서 부딪치는 모든 일저무는 시간 속에 마음을 고요히 하고갯벌에 숨어 있는 조개를 찾듯두 눈을 크게 뜨고 그대를 찾기로 했습니다.내가 발견해야만 빛나는 옷 차려입고사뿐 날아올 나의 그대내가 길들여야만 낯설지 않은 보석이 될나의 그대를...

M E D I A/詩 2025.01.19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이모에게 이모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성인이 된 이후로 느꼈던 내 마음 을 선선히 인정했다. 내가 거듭해서 이모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결국 비슷한 주름을 얼굴에 새기면서 싫어하는 것들의 목록만 늘 려가는 인간이 될까봐, 자기 상처에 매몰되어 다른 사람의 상처 는 무시하고 별것도 아니라고 얕잡아 보는 편협하고 어두운 인간이 될까봐 겁이 났다는 사실을. 하지만 나는 이미 그런 사람이 되 어가고 있었다. 이마에 떨어진 차가운 눈송이가 곧 물방울이 되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M E D I A/책방 2025.01.19

너무나 많은 여름이 -김연수

나 혼자만P17. 나는 매일 너에게서 뭔가를 배웠어. 네 앞에서는 좋아하는 것들만 생각하기. 태풍이든 장마든 뭔가 몰아칠 때는 그때야말 한없이 나태해지고 게을러지기. 지금 이 순간, 기다릴 만한 것을 기다리기. 아무리 작고 사소하더라도 변화에 민감하기. 비 가 그친 뒤 바람의 미세한 변화나 '오늘은 산책을 나가도 되지 않을까?' 같은 생각들을 흘려보내지 말고 알아차리기. 좋아하 는 것들 앞에서는 온몸으로 기뻐하기.내 미약한 마음마저 그대로 느끼던 네가 어찌나 경이롭던지.그런 네게 "아니, 아직은 안 돼"라고 웃으며 말할 때, 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P104. # 코멘터리 03•그전까지의 삶은 혼자서 꾸는 꿈과 같다고 말씀하셨잖아 요""그렇습니다.""그전까지의 삶이 꿈과 같다면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슬픔이..

M E D I A/책방 2025.01.19

어른을 위한 그림책테라피

P229. 진정한 나와 세상의 위로가 만나는 지점 그림책테라피는 개개인의 삶의 경험과 가치를 문화예술을 통 해 표현하고, 다른 이들과 소통함으로써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돕 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경험하고 인식하는 데 중요한 매 개체 역할을 하는 그림책을 통한 마음 치유를 말합니다. 'Therapy' 라는 말은 '주의를 기울이다'라는 뜻의 그리스어의 Therapia'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세 가지 측면에서 그림책테라피 과정 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림책의 시각언어와 문자언어 를 통해 작가가 전하는 이야기를 만난다는 것. 두 번째는 그림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는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과 만나고, 세 번째는 타 인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사고가 확장되어 세상과 만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M E D I A/책방 2025.01.19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 류시화

P52. 절실히 원한 모든 순간이 날개신이 말했다."절벽 끝으로 오라." 나는 말했다."할 수 없어요. 두려워요 신이 말했다."절벽 끝으로 오라.""할 수 없어요. 추락할 거예요!" 신이 다시 말했다."절벽 끝으로 오라.그래서 나는 갔고, 신은 나를 절벽 아래로 밀었다. 나는 날아 올랐다.P64. 나의 지음을 찾아서백아는 거문고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연주했고, 종자기는 그 음악을 통해 백아의 마음을 이해했다. 거문고를 매개로 두 사람 은 단순히 음악 세계만이 아닌 마음의 세계가 일치했다.그러한 지음이 당신에게는 존재하는가? 혹은 당신 자신이 누 군가의 지음인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관계는 나의 '음'을 이해하는 사람과의 만남이다. 처음 만났는데도 내 마 속 '음'을 아는 사람, 마치 몇..

M E D I A/책방 2025.01.19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경비입니다

미술관이 문을 닫을 시간이 가까워울 때까지도 나는 계단 맨 꼭 대기의 내 자리에 서 있다. 저 아래 그레이트 홀은 소란스럽기 그지없다. 사람들이 바다처럼 몰려가 맡겨뒀던 옷을 찾아 입고, 지도를 보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세상을 떠나 일상과 삶으로 돌아가는 수순을 밟고 있다.많은 경우 예술은 우리가 세상이 그대로 멈춰 섰으면 하는 순 간에서 비롯한다. 너무도 아름답거나, 진실되거나, 장엄하거나, 슬픈 나머지 삶을 계속하면서는 그냥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순 간 말이다. 예술가들은 그 덧없는 순간들을 기록해서 시간이 멈 춘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들은 덧 없이 흘러가버리지 않고 세대를 거듭하도록 계속 아름답고, 진 실되고, 장엄하고, 슬프고, 기쁜 것으로 남아..

M E D I A/책방 2025.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