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걸P46.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어릴 적을 생각하면 기억 나는 나무가 하나 있다. 모질고 긴 겨울 내내 도전적인 초록색을 자랑하며 우뚝 서 있던 푸른 빛이 도는 은청가문비다. 그 나무의 바늘 같은 잎들은 하얀 눈과 잿빛 하늘에 화가 나기라도 한 듯 날카로웠다. 내 속에서 키워가던 금욕주의적 성향 의 롤모델로도 완벽했다. 여름에는 그 나무를 껴안고, 오르고, 이야기를 나누며, 그 나무가 나를 잘 알고, 그 아래 있으면 내가 투명인간이라는 상상을 했다. 개미들이 시든 나뭇잎을 들고 왔 다 갔다 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들이 곤충들 지옥에 빠지는 저주 를 받은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그 나무가 사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물과 공기 로 자신이 필요한 음식을..